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궁을 창건한 조선 태종부터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그곳을 재건한 광해군까지, 이어서 인조, 숙종, 정조, 순조가 개수 증축해 오늘 우리에게 은총처럼 전해준 그 왕실 정원의 미를 말이다. 사람들이 그곳을 비원(秘苑)이라 즐겨 불렀던 만큼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세련된 풍류가 한데 어울려 곳곳마다 반듯하고 정갈하다. 그 아름다움을 탁월하게 응축한 곳으로 많은 이들이 왕과 신하가 뱃놀이를 즐겼다는 네모 모양 연못 부용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의 바위를 깎아 물길을 낸 옥류천을 든다. 둘 모두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조금의 인위를 더함으로써 우주의 질서를 따르고 만물과 조화하는 인간상을 도모했던 선조들의 미의식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헌데 그 같은 미의식은 비단 풍류의 장소에만 깃들지 않았다. 학문과 교육의 공간에도 은은하면서도 단호하게 아로새겨졌다는 말이다. 정조 즉위년에 세워진 주합루(宙合樓)가 그 대표적 공간이다. 꽃과 물놀이하던 부용정 부용지와 대척하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높이에 축성된 바로 그 건축물. 왕실 직속 서고인 규장각이 일층에 자리하고, 왕의 경연(經筵)은 물론 군신(君臣) 간의 교육과 대화를 위한 누마루가 이층을 이루고 있는 그 공간. 거기서 옛 통치자와 지성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천지우주와 합일하는 학문을 추구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왕과 신하는 주합루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어수문'(魚水門)이라는 현판이 세로로 걸린 일각문과 양 옆의 협문을 구별해 썼다고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문의 유래와 건축이다. 우선 '어수'는 '수어지교'(水魚之交)에서 따온 것으로,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생래적으로 상호 필요 충분한 군신관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주합루에 오르는 왕과 신하는 유별해서 중앙에 높게 솟은 팔작지붕 문으로는 왕이 왕래하고, 신하는 그 양 옆 절반 정도 키 낮은 문을 써야 했다. 이렇게 어수문은 지의 공간인 주합루로 들어서는 이들이 가져야 할 공통의 마음가짐과 몸가짐, 그리고 상징적인 동시에 실제적인 관계에 요구되는 차별적 예법을 건축으로 형식화하고 있다. 요컨대 풍류의 대척점에서 학문을 우러르고 지적 실천을 도모하되, 언제나 그에 합당한 격과 규율을 지키라는 무언의 요구다.
그럼 우리사회 학문과 교육의 상징인 대학의 이미지를 주합루와 어수문의 그 같은 면모에 비추면 어떤가. 물론 몇 백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모든 시스템이 변했고, 가치관이 바뀌었으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 시대인과 전면적으로 다르다. 해서 일대일로 조선시대 학문기관과 오늘 우리의 대학을 비교한다면 무리가 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어쨌든 학문연구는 독자적 영역으로서 존중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구별과 의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런 공감대의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대학의 교육이 오직 취업률에만 매달리고, 일선 노동현장의 전초기지가 되어야 하며, 연예오락처럼 가볍고, 흥행 산업처럼 돈벌이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도를 넘었다. 결과적으로 이제 대학은 시장판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곳이다. 예컨대 교육부는 '대학 구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을 산업통상자원부가 규제 관리하는 산업체와 동일시한다. 또 주류 언론은 대학 재단의 각종 비리, 성추문, 심지어 '전력 낭비'를 연일 기사화하며 국민들의 의식에서 성역과도 같았던 상아탑 이미지를 흐물흐물 녹여버린다. 문제가 있어 지적하고 개혁을 유도하는 일은 언제나 이미 옳다. 하지만 대학 고유의 가치와 기능이 길을 잃을 정도의 외부 압력, 대학 구성원이 부당한 피해의식에 시달릴 만큼 부적절한 여론몰이는 결코 옳지 않다. 오늘 우리의 대학에서 우주적 지의 세계를 구축하느라 쓰는 우회의 시간, 자본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에너지 소비가 쓸모없고 부도덕한 일로 꾸준히 폄훼될 경우 미래 세대 앞에 주어지는 은총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강수미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ㆍ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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