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사업비 8조3,000억원 규모의 차기전투기(F-X) 사업이 종착점 앞에서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절차대로 진행한 끝에 사실상 미국 보잉사의 F-15SE가 단독 후보가 됐지만, 스텔스(레이더망 회피) 성능은 F-35A보다 떨어지고 기술 이전 수준은 유로파이터보다 약하다는 점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공군이 스텔스 성능이 가장 좋은 F-35A를 원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거액을 들여 30년간 한국 영공을 지킬 전투기를 선정하면서 성능은 뒷전이고 가격만 따지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오지만 그렇다고 아무 절차적 하자 없이 진행된 사업을 재검토할 경우 1~2년의 전력 공백이나 국가 신뢰도 추락 등 문제도 많다. 왜 이런 딜레마 상황이 초래됐을까.
"예산 더 주겠지" 안이한 방사청
가장 큰 몫을 한 것은 무엇보다 방사청의 안이한 태도다. 애초 2010년 총사업비를 책정할 때부터 치밀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당시 국방부 산하 국책 연구기관이 미 록히드마틴사(F-35A)와 보잉,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EADSㆍ유로파이터) 등 사업 참가 의향을 보인 업체들로부터 고성능 전투기 60대의 공급 예상가를 받아 평균치를 낸 뒤 협상으로 깎을 수 있는 여지까지 감안해 산정한 게 현재 사업비 8조3,000억원이다.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실이 1조8,000억원이 모자랄 거라는 전망을 내놨지만 사업비는 달라지지 않았다. 군 관계자는 "방사청이 총사업비의 20%까지는 재정당국이 국회 승인 없이 올려줄 수 있다는 규정을 염두에 두고 예산 증액을 무모하게 낙관한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사업 착수 직전엔 강한 스텔스 기능을 군 요구성능(ROC)에 포함해 주길 원했던 공군을 설득해 조건을 대폭 낮추기까지 했다. 다른 기종들과의 경쟁을 유도해 F-35A를 더 싸게 사보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F-35A는 가격이 사업 예산을 초과해 중도 탈락했고 의도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다른 군 관계자는 "마음에 드는 제품을 싼 값에 사보려고 들러리를 세웠다가, 정작 필요한 건 못 사고 엉뚱한 들러리만 손에 들게 된 꼴"이라고 말했다.
손발 안 맞는 군과 정부
방사청만 질책할 일도 아니다. 실제 전투기를 운용할 당사자로서 임무 수행을 위해 어떤 전력이 필요한지를 딱 부러지게 주장하지 않은 공군과, 사업이 목표를 벗어나든 말든 예산을 한 푼도 올려줄 수 없다고 방사청 부탁을 단칼에 자른 기획재정부의 책임도 크다는 얘기다. 한 정부 관계자는 "재정 압박으로 새 대통령이 강조하는 복지에 배분할 예산도 부족한 마당에 기재부가 전(前) 정부가 넘긴 사업 예산까지 챙길 여유는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반대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만큼 섣불리 결정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희우 충남대 종합군수체계연구소장은 "F-15SE는 기종 자체가 스텔스를 구현하기 어렵다"며 "한국 공군만 사용하는 기종이어서 운영유지비도 많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항공무기 전문가는 "F-5 등 구형 초급 전투기의 도태로 인한 전력 공백은 국산 경공격기 FA-50을 증산해 메우면 된다"며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전쟁 억지력과 기술 수준이 탁월한 기종을 도입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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