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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성지가 오종종 모인 전북 둘레길 순례… 뒤돌아볼 만한 풍경은 적어도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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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성지가 오종종 모인 전북 둘레길 순례… 뒤돌아볼 만한 풍경은 적어도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길

입력
2013.08.21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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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시작한 지 스물 하루째라는 순례자는 전날 저녁부터 밥을 걸렀다고 했다. 그러나 표정에 허룩함이 없었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부락. 구판장 하나 없는 천주교도 마을 입구에서 그를 만났다. "나이 육십이 됐을 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티베트 사람들이 오체투지하듯, 내게도 지금 그런 순례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신일철 스테파노라는 이름의 순례자는 7월 2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서부터 계속 걷고 있었다. 강진까지 묵상하며 간다고 했다. 말투가 참매미 울음소리의 여운처럼 담결했다. 팔월의 아침 해는 급하게 솟아올라서, 평상을 덮은 정자나무의 그늘이 금세 짧아졌다. "그럼, 이만." 그가 먼저 일어섰다. 김제평야의 차진 녹색 속으로 허기도 더위도 잊은 순례자의 뒷모습이 사라져갔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다. 전라북도가 '아름다운 순례길'이라고 이름 붙인 길의 외모는 말처럼 아름답지 않다. 북으론 금강의 물굽이를 바라보고 남으로는 모악산을 감싸고 한 바퀴 도는 이 길은 육백 리(240㎞)에 이르는데, 그 길에 걸린 풍경은 수려함이나 영검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마을 고샅이거나 농로이거나 더러는 아스팔트 포도인 시골 여염의 길을 이었다. 길은 분뇨 냄새 넘어오는 축사 담벼락을 피하지 않고 매운 농약 기운에 코를 막아야 하는 논두렁도 버리지 않는다. 짓고 부수길 밥 먹듯 반복하는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의 살풍경 또한 비껴가지 않는다. 요컨대 눈에 담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이 길엔 박하다.

그럼에도 길 위엔 날마다 새로운 발자국이 찍힌다. 지난해엔 6만 명이 찾아와 걸었다고 한다. 왁자하게 떠들며 지나는 걸음보단 침묵에 잠겨 타박거리는 걸음이 이 길에 어울린다. 눈길을 빼앗아 분심을 일으키는 경치 대신, 여러 종교의 씨앗이 이 강토에 떨어져 발아하던 때의 흔적이 이곳엔 고스란하다. 순례길은 그 흔적들을 꿰고 간다. 신앙이 있든 없든, 그것이 무엇이든 크게 관계는 없다. 팔월 염천에 그늘도 뜸한 이 길에 나섰다면 당신은 이미 순례자가 된 것이다.

남북으로 길쭉한 자루 모양인 순례길의 우묵한 바닥엔 모악산이 담겨 있다. 엄마(母)뫼(岳). 꼭대기에 아이를 안은 어미 형상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름 탓인지 이 산은 참 여러 종교의 성지를 품고 있다. 산자락을 걷다 처음 마주친 곳은, 나무로 만든 십자가 탑이 인상적인 금산교회였다. 오래된 한옥 교회가 무척 소담하고 고졸하다. 내부로 들어가면 'ㄱ'자 형태의 독특한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교회가 세워진 건 1908년, 남녀가 유별했던 시절이어서 기역자가 꺾이는 가운데 부분에 강단을 두고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았다. 상량문도 남자석 쪽은 한문, 여자석 쪽은 한글로 돼 있다.

기독교의 평등사상이 유교의 반상질서와 섞이는 전환의 풍경은 교회의 생김새보다 창건내력에서 더욱 드라마틱하다. 교회 터는 본래 이곳에서 마방을 운영하던 부호 조덕삼의 땅이었다. 그는 공맹의 글을 읽고 자랐으나 생각이 활짝 열린 사람이었다. 기독교 복음에 감화된 그는 1905년 자신의 땅을 교회에 내놓았다. 그때 자신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이자익도 함께 기독교에 귀의했다. 몇 해 뒤, 교회의 장로를 뽑기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뜻밖에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됐다. 머슴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된 상전. 조덕삼은 그러나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린 결정"이라며 기꺼이 따랐다. 훗날 야당 정치인 가운데 여당 인사들도 인품을 인정했던 고 조세형 전 일본대사가 그의 손자다.

순례길에서 가장 알려진 유적은 금산사다. 유명세 탓에 초입의 계곡은 물놀이객이 첨벙대는 소리로 온통 벅적하고, 기어이 대낮부터 돼지고기를 구워대는 캠핑존까지 허가해주고 말았다. 귀신사부터 금산사까지 이어지는 조용한 숲길 끝에 바로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그래, 진짜 순례자라면 세상의 낭자함도 외면치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범박한 유흥의 풍경 속을 걷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금산사 미륵전의 유명한 미륵부처에 대한 얘기는 생략하자. 다만 그 미륵이, 한 시대가 저물고 시작되던 100여 년 전, 무너진 꿈에 절망한 민초들에게도 의지처가 됐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혁명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동학 세계관에 미륵불 출세사상, 기독교 메시아 재림사상을 아우른 증산교가 태동했다. 순례길에 있는 증산법종교 본부의 증산미륵불은 금산사 미륵부처를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민족 종교의 성지가 모악산 자락에 오종종 모여 있다. 김제와 완주, 익산 땅은 드물게 비옥한 평야다. 수확이 풍요로운 만큼 수탈도 극심했을 테다. 그래서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미륵, 수많은 신령이 여기 깃든 이유는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모악산 비탈을 벗어난 길은 너른 들판 위로 유장하게 펼쳐진다. 마을과 탑, 옛 성의 흔적, 기차소리가 멎은 폐역을 그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다. 춘포遮?이름의 시골 마을에서 발걸음이 멎었다. 1930년대 일본인 지주(호소가와)의 집이 남아 있는 것 외엔 별다를 게 없는 마을이다. 그런데 마을의 남쪽 경계를 이루는 도톰한 제방에 오르면, 만경강이 호남의 들을 적시며 흐르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분명 장쾌한 스케일인데도, 말할 수 없이 처연했다. 태초부터 늙은 채로 태어난 듯한 강. 그 까닭을 말로 할 방도를 아직 알지 못한다. 순례길을 걷는다면 만경강에 저녁놀이 번질 시간 이곳을 찾아야 옳을 것이다.

순례길의 북쪽 끝은 나바위성당이다. 100살이 조금 넘은 집이다. 몸체는 뒤쪽을 팔작지붕으로 낸 이층 한옥인데 정면엔 고딕의 첨탑을 세웠다. 그게 그토록 어울릴 수 없다. 하지만 감탄하기엔 이르다. 성당 뒤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금강을 굽어볼 수 있는 언덕 위엔 김대건 신부 순교탑과 정자(망금정)가 있다. 가톨릭 신자들의 조용한 기도처다. 그런데 정자 뒤편 언덕을 조금 돌면, 순교탑과 정자를 이고 있는 바위언덕에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바위성당 마애삼존불. 아마 천 년도 더 전에 부처님은 그 자리에 좌정했을 텐데, 지금은 기꺼이 천주의 자식들을 외호하고 계시다.

길은 그렇게 끝이 난다. 아니 길쭉한 고리 형태이니 사실 길은 시작도 끝도 없다. 9개로 쪼개 놓은 코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느 한 코스를 붙잡고 걸어도 좋고, 남들이 그어 놓은 금 따위는 무시하고 제 가고 싶은 대로 걸어도 된다. 나선무늬의 달팽이 그림이 코스를 안내하는 이정표다. 다시금 말하거니와, 망막에 비치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여정을 모두 마치고 난 기억은 아름다울 것이다. 아마 순례란 본래 그러한 것이 아닐까. 삼복 더위, 팥죽땀 흘리며 전북 내륙을 한참 걷고 얻은 결론이 그것이다. 가슴 속에 분열과 갈등이 있다면 길을 떠날 일이다. 길이, 화답해올 것이다.

익산ㆍ김제ㆍ완주=글ㆍ사진

[여행수첩]

●찾아갈 땐 전주 시내에서 버스를 타는 게 편하다. 남쪽 끝 금산사(6, 7코스 분기점)는 전주역에서 시내버스 79번, 북쪽 끝 나바위 성지(3, 4코스 분기점)는 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546, 300번 버스를 타면 된다. ●스마트폰에 '아름다운 순례길'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 받으면 각 코스별로 교통과 숙박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GPS를 이용한 자신의 위치도 확인할 수있다. ●3코스에 속한 여산장에서는 장날(1, 6일)마다 이 지역만의 순댓국밥과 똥짜장을 맛볼 수 있다. 3대, 70년째 이어온 똥짜장은 소다를 첨가해 면이 쫄깃하고 부드럽다. 전라북도 문화관광정보 (063)280-3336.

[2013 세계순례대회]

'아름다운 순례, 홀로 또 함께'를 주제로 한 2013 세계 순례 대회가 9월 28일부터 10월 5일까지 아름다운 순례길 일대에서 진행된다. 세계 종교 지도자와 순례자 약 1만 5,000여명이 참석해 자신의 내면과 이웃의 삶을 바라보며 걷는다. 국내외 멘토와 함께 걷는 프로그램, 호남지역 선교사 등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한 '느바기 순례', 학교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치유의 순례 등도 마련된다. 세계순례대회 조직위원회 (063)278-1101.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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