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부에게 여행이란 자발적 고행의 완곡어법이다. 기저귀더미부터 유모차까지 이민 가방 수준의 여행가방을 꾸릴 때마다 어른들은 '왜 생돈 써가며 고생이냐'고 혀를 차기 일쑤. 한때 자유로운 영혼의 표상이라 자부했던 이들 부부 역시 돌아오는 길이면 번번이 '아직은 무리인 걸까' 회의에 빠진다. 좌석도 따로 없는 20개월짜리 딸을 안고 비행 내내 몸부림칠 때, 어른 맞먹는 비용을 치른 버젓한 자리를 놔두고 굳이 아빠 품으로 파고드는 네 살짜리 아들의 기내난동을 온몸으로 저지할 때, 이 부부는 내면으로 절규한다. '이것은 여행이 아니다.'
한국인으로 붐비는 가족여행지가 싫다면
그러나 여행의 충동을 내내 견딜 수만은 없는 법. 수많은 이 땅의 젊은 부모들이 떠나고 또 떠나는 이유다. 행복은 결코 유예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 덕분에, 최근 몇 년 새 아이를 동반한 가족여행은 그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신혼여행지로 이제 막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필리핀 레가스피는 한국인으로 붐비는 기존 여행지에 식상한 이들을 위한 가족여행의 새로운 보물섬이다. 휴양과 관광과 레저가 황금비율로 조합된 미지의 섬. 여기에 더해 환대가 있다. 고객 응대 전략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태도로서의 환대, 자연스럽고 천진하게 우러나와 받는 사람마저 순식간에 물들이는 생의 정신으로서의 환대다.
7,0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은 주지하다시피 인도네시아에 이은 세계 제2의 섬나라다. 레가스피가 위치한 루손섬은 국토의 96%를 차지하는 주요 11개 섬 중 가장 규모가 큰 섬. 루손섬 남동쪽의 레가스피는 필리핀 재벌들의 휴양지로 유명한 곳답게 많은 것이 극단적이다.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의 인공적 호화로움과 미개발지의 특유의 과묵하고 무심한 자연이 묘한 길항의 효과를 자아낸다. 강렬한 첫인상으로 망막을 압도하는 레가스피의 무섭도록 우거진 열대림. 그 숲과 나란히 4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이 미개발지를 매혹적인 가족여행지로 부상시킨 일등공신, 미시비스 베이 리조트(www.misibisbay.com)에 닿는다.
'레저의 천국' 미시비스 베이 리조트
5성급 휴양시설인 미시비스 베이 리조트는 1㎞에 달하는 전용해변과 유아풀을 포함한 세 종류의 수영장, 37개의 독립된 호화 빌라와 57개의 호텔식 룸을 갖추고 있다. 조경이 빼어난 리조트 경내를 걷는 것만으로 남국의 여흥이 절로 돋는다.
리조트에서의 휴양이란 게 하루만 지나도 지루하거나 나른해지기 십상이지만, 이곳에서는 사나흘도 부족할 만큼 일정이 촉박하고 분주하다. 흔히 액티비티라고 부르는 다양한 레저활동 때문이다. 수영하다가 짬짬이 즐겨보라고 몇 개 구색만 갖춰놓은 수준이 아니다. 만2세 이상부터 성인까지 촘촘히 연령대가 배분된, 바다와 산을 아우르는 액티비티가 30여개에 달한다. 윈드서프, 카약, 스노클링, 제트스키, 바나나보트, 다이빙, 페달보트, 선셋크루즈 같은 잘 알려진 해양 레포츠뿐 아니라 보드 위에 서서 노를 젓는 스탠드업 패들, 요트의 일종인 호비 캣 세일링 같은 새로운 레포츠도 체험해 볼 수 있다. 청정해역에만 사는 지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 그러나 이름과 달리 온순하기 그지없는 고래상어를 보러 투어에 나설 수도 있다.
물놀이가 지겹다면 산 속에서도 스릴 넘치는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요청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10분 거리의 산 속으로 실어 날라주는 골프카와 운전자 겸 가이드가 언제나 즐거운 얼굴로 리조트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다. 험준한 지형에서도 달릴 수 있는 전 지형 만능차 ATV(All-terrain vehicle)를 타고 리조트 주변의 ATV코스를 신나게 달려볼 수도 있고, 좌우 두 바퀴로 서서 타는 전동차인 세그웨이를 타고 이곳저곳 탐험에 나설 볼 수도 있다. 지상을 향해 사선으로 떨어지는 200m와 400m 길이의 지프라인(Zipline)에 몸을 맡긴 채 짜릿하게 창공을 날아보는 것은 아무데서나 해 볼 수 없는 체험.
수영복 차림의 네 살 아들이 반쯤은 겁에 질려, 반쯤은 호기심에 홀려 200m 지프라인에 매달렸을 때, 밑에서 지켜보는 젊은 부모의 표정에는 불안과 염려의 안색이 엄습한다. 결연한 의지로 마침내 허공에 첫 발을 내디딘 소년이 날렵한 하강으로 새처럼 가볍게 지상에 착지한 순간. 젊은 부모의 환호가 산중의 고요를 상쾌하게 찢는다. 그 때, 아직은 아기 같던 소년의 얼굴에 환하게 피어오르던 그 자긍심이란.
화산과 바다의 완벽한 조응
레가스피를 숱한 휴양지와 구별 짓는 단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욘(Mayon) 화산이다. 마욘은 필리핀 현지 언어인 타갈로그어로 '예쁘다'(beautiful)는 뜻이다. 하지만 이 예쁜 화산은 놀랍게도 활화산이다. 올 5월에도 분출해 17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지난 400년간 48번이나 폭발했다. 하지만 겁 먹을 필요는 없다. 소개령이 떨어졌을 때, 구태여 분출하는 화산을 향해 등반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퍼펙틀리 셈鎌?"
이 원추형 화산의 매력은 완벽한 좌우 대칭에서 나온다. 한복 저고리의 배래처럼 완만한 곡선이 한참 이어지다가 상부 능선에 이르면 기울기가 30~40도 정도로 급격하게 가팔라진다. 그리고는 마침내 폭발하는 분화구. 오래 인내하며 살아온 자의 극적 긴장 같은 것이 이 화산에는 있다.
마욘화산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관광지는 카그사와 유적(Cagsawa Ruins)이다. 1841년 화산이 폭발했을 당시, 이곳에 있던 교회는 용암에 무너지고 가장 높이 솟아 있던 종탑만 남았다. 바로 카그사와다. 신의 구원만을 기다리며 교회 안으로 몰려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용암에 희생된 폐허. 이 폐허에 우뚝 솟은 카그사와 종탑은 역설적이게도 마욘 화산이 가장 환하게 보이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레가스피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필리핀 최고의 수상스포츠 테마파크인 '카마린스 수르 워터스포츠 콤플렉스'에 닿는다. 이 일정을 위해 젊은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의 미시비스 베이를 떠나 레가스피 시내의 부티크호텔 세인트 엘리스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카마린스 수르 지역구에 위치한 이 호화로운 수상스포츠 공원에서는 인공호수에 케이블 로프를 설치해 로프가 이끄는 방향에 따라 서핑을 즐길 수 있는 웨이크 보드, 웨이크 스케이트, 워커스키 등을 초보자도 쉽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 물론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젊은 아빠는 첫 웨이크보딩에서 로프를 놓치고 물에 빠지길 수 차례.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어기찬 응원소리가 호수 위로 청량하게 울려 퍼진다. 이곳은 가족여행의 새로운 보물섬, 레가스피다.
◆여행수첩
●필리핀항공이 서울에서 수도 마닐라까지 매일 오전과 밤 시간대 두 차례 운항한다. 4시간 소요. www.philipineair.com, 1544-1717. 마닐라에서 레가스피까지는 필리핀 국내선을 이용하면 약 한 시간가량 걸린다.
●시차는 한국보다 1시간 늦다. 화폐단위는 페소(Peso)로, 1페소에 약 27원. 미국 달러화를 가져가 필리핀 현지에서 페소로 바꾸는 게 한국에서 페소로 바꿔가는 것보다 환율이 좋다. 현지에서 출국시 1인당 550페소의 공항세가 필요하다.
레가스피(필리핀)=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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