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게는 '중립'이니 '중도'니 하는 말처럼 한심하게 느껴지는 말이 없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건 눈앞에 마주한 정치적, 사회적 사안에 대해 일말의 판단조차 내릴 줄 모르는 정신적 무능력의 표현이거나 무관심에 대한 변명일 뿐이지 무슨 변변한 입장 따위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오래전 막스 베버가 내세웠던 '가치중립성' 역시 특정한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는 기존 체제에 봉사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거나 아예 실현 불가능한 태도라고 비판받은 바 있거니와, 굳이 이런 사회학개론 같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살아온 경험을 통해 중립과 중도 운운하는 입장에 감춰진 비겁함과 나태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중립'과 '중도'를 지킨다고 하면 여전히 점수를 먹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 앞에 '엄정'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으면 금상첨화다. 엄정중립을 지키고 중도의 길을 걷는다는 말에는 뭔가 정치적 사안을 둘러싼 파당들의 시끄러운 갈등에 휩쓸리지 않고 쿨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것이다. 이런 중도론이 양비론에서 비롯된 정치혐오증이나 정치무관심증을 대신하는 말로 곧잘 쓰이는 건 이미 다들 느끼고 있는 바일 텐데, '중간'이라는 말이 가진 불편부당성과 중용의 이미지 때문에 쉽게 탓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주희는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을 해설한 서(序)에서 '中'의 의미를 "윤집궐중(允執厥中)"이란 말로 풀이했다. '진실로 그 한가운데를 잡으라'는 뜻인데, 여기서 '한가운데'란 중간이 아니라 적중(的中)의 의미로 핵심이나 본질을 꿰뚫으라는 말이다. 결국 중용의 길은 그저 수학적인 의미의 가운데가 아니라 일의 핵심이나 진실을 움켜쥐려는 태도에 붙일 수 있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일쑤 취하곤 하는 중도의 입장은 중용의 본래 뜻보다는 사안의 핵심이나 진실을 알기 어려운 상태에서 택하는 방편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지난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막판까지도 25%를 점한 부동층의 태도나, 국정원 선거개입 또는 NLL 대화록 시비를 두고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이 다 그러하다고 본다. 어느 쪽이 더 옳은지,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실을 축소, 과장하거나 본질을 호도하는 쓰레기 언론의 탓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사건의 실체니 총체적 진실이니 하는 말에 매달려서 눈앞에 뻔히 보이는 진실을 유보하는 심리적 이유도 커 보인다. 요컨대 진실이 두려운 것이다.
이를테면, 국정원 선거개입이 지난 12월 급박했던 며칠간의 표심 변화에 어떻게 작용했고, 국정원 여직원의 '셀프감금'과 그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여성인권 발언, 그리고 경찰의 무혐의 수사발표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히는 게 진실이다. 그래서 과연 표의 비율을 바꿀 만큼 영향이 있었다면 선거무효든 사임이든 진실과 정의를 실현해야 할 일이다. 그게 아니고 국정원 개입은 있었으나 미미한 영향에 그쳤다면 또 거기 맞는 합당한 조치를 취하면 될 일이다. 그게 두려워서, 사회적 혼란이 걱정되어서, 진실을 유야무야로 만들거나 타협과 조정의 어중간한 길로 간다면 우리의 민주주의에는 희망이 없다.
'진실은 신만이 안다'는 식의 최종적 진실만이 진실인 것은 아니다. 올바른 판단을 위한 자료들과 객관적 정보가 아무리 제한되어 있다 해도, 우리는 크고 작은 진실들을 이미 안다. 엊그제 국정조사에서 조명철 새누리당 의원이 권은희 수사과장에게 "증인은 광주의 경찰인가, 대한민국의 경찰인가"라는 역겨운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그 말에 무슨 의도가 담겨있고 진의가 무엇인지 알 만한 양식쯤은 모두 갖추고 있다.
진실 앞에서 중립과 중도란 없다. 진실이 가리켜주는 길만이 있을 뿐이고, 그래서 진실의 결과가 무엇으로 드러나건 우리는 그리로 나아가면 된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이런 말들이 중도를 표방하는 한국일보를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이 신문의 중도주의가 끝까지 진실을 추구하겠다는 다짐이라 믿는다.
안희곤 사월의책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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