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후우….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죠."
21일 오후 1시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의 한 감귤원. 새벽부터 9시간째 귤나무에 물주기 작업을 하던 강인제(69)씨는 물을 뿌리다 지쳐 바닥에 주저 앉았고,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토해냈다. "나무를 한 번 보세요. 잎은 누렇게 말라 비틀어지고 열매는 때깔을 완전히 잃었어요."
바닥에서 흙을 한 줌 쥐어 보인 강씨는 "50일 넘게 가뭄이 이어지면서 땅에 물기가 하나도 없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과수원에 흙바람이 일어난다"며 "그동안 비가 안 온 것도 문제지만, 이러다 갑자기 많은 비가 오면 열매살이 껍질보다 먼저 성장해 감귤 껍질이 벌어지는 현상이 나타날텐데 그것도 큰 일"이라고 하소연했다.
제주가 바짝 타들어가고 있다. 50일 넘게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은 데다 폭염까지 겹치면서 섬 곳곳이 생기를 잃어 가고 있다. 90년 만에 찾아온 사상 최악의 가뭄에 농작물 피해가 속출하고 식수난까지 이어지자 제주도는 정부에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달라"고 요청하고 나섰다.
지난 7월 한 달 동안 제주지역에 내린 비는 14.7㎜. 평년(239.9㎜)의 6% 수준이다. 1923년 기상 관측 이후 최저 강수량이다. 8월 이후의 강수량도 제주시 28.2㎜, 서귀포 39.1㎜, 성산 43.3㎜, 고산 20.1㎜에 불과하다. 평년의 10~20% 안팎에 그치고 있다. 주민들은 올 여름 제주에는 "병아리 눈물만큼 밖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표현할 정도다.
이처럼 가뭄이 길어지면서 농작물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감귤은 제대로 자라지 않고 있으며, 지난 7월 첫 파종에 들어간 도내 당근밭 1,552㏊ 가운데 570㏊에서 발아가 제대로 안 돼 재파종 해야 하는 상황이다. 밭벼 또한 생육부진으로 15% 정도 수확량 감소가 예상된다.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8월 중순이 지나면 양배추와 브로콜리 등 월동채소를 파종해야 하지만 최근 가뭄 상황에서는 파종마저 어려워 올해 월동채소 작황이 크게 나빠질 전망이다.
도가 가뭄에 따른 주요 농작물 피해액을 잠정 산정한 결과 현재까지 총 1,698억6,700만원 상당의 소득감소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됐다. 작목별로는 노지감귤(1,020억원)의 소득 감소가 가장 클 것으로 추정됐고, 이어 당근(474억7,400만원), 콩(148억원), 수박(32억1,800만원) 등의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됐다.
식수난도 도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산간 지역에 식수를 공급하는 한라산 어승생 제1저수지는 저수용량(10만7,000톤)의 절반인 5만여톤만 남았고, 제2저수지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6일부터는 중산간 지역 11개 마을 2,300가구에 격일 제한급수가 이뤄지고 있다. 앞으로도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 3일에 하루만 물을 공급해야 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제한 급수에 중산간 펜션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아예 예약을 받지 않는 곳도 생겼다. 제주시 애월읍 한 펜션 주인은 "이틀에 한 번씩 물이 끊긴다는 소식에 물탱크 용량을 늘렸지만 물이 부족해 손님들에게 물을 조금만 써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며 "어쩔 수 없이 몇 달 전에 예약했던 손님만 받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도의 특별재난지역 선포 요청에 대해 안전행정부 관계자는 "재난지역으로 선포되려면 시설물 피해액이 90억원 이상이어야 하지만 제주도 농작물 피해의 경우는 시설물 피해에 해당하지 않아 현재 선포 여부를 놓고 검토 중"이라며 "다만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업재해대책법에 따라 지난 20일부터 해당 지역에 피해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제주=정재환기자 jungj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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