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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6.5/8월 20일] 스티브 잡스를 잊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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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36.5/8월 20일] 스티브 잡스를 잊어주세요

입력
2013.08.1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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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IT 기업 애플의 창업주 고(故) 스티브 잡스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지난 17일 미국에서 개봉됐다. 개봉 첫 주말 성적은 7위에 불과했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이어서인지 미국인들의 관심은 뜨거운 모양이다. 국내에서도 이달 말 개봉 예정인데, 잡스가 최대의 라이벌로 꼽았던 삼성전자의 안방에서 어느 정도 흥행 성적을 올릴 수 있을 지 궁금하다.

잡스가 사후에도 여전히 미국인의 큰 관심을 끄는 이유는 시대를 대표하는 혁신가였기 때문이다. 아이폰을 내놓아 휴대폰 문화를 송두리째 뒤집었고, 자판기에서도 MP3 재생기인 아이팟을 살 수 있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생활을 바꿨다.

그렇다 보니 박근혜정부도 잡스를 창조경제의 역할 모델로 꼽고 있다. 이달 초 정부는 국무총리 주재로 국가정책조정회의를 열어 '창조경제를 견인할 창의인재 육성 방안'을 내놓았다. 미래창조과학부, 교육부, 고용노동부 등이 함께 추진하는 이 정책은 잡스 같은 창의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학교에서 소프트웨어 교육을 강화하고, 2015년에 소프트웨어 마이스터고를 개교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뒤이어 미래부는 지난 13일 '한국판 스티브 잡스 키우기 프로젝트'로 이를 뒷받침했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소프트웨어 조기교육이다. 초ㆍ중등학생에게 온라인 소프트웨어 강의를 실시해 어려서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겠다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하면 우리나라에서 잡스 같은 혁신가가 쏟아져 나올까. 정부는 잡스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교육 부재에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니 온통 정책의 초점이 소프트웨어 교육이나 관련 학교 개설 등에만 맞춰져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온갖 학원 수강에 녹초가 되고 있는 초등생들이 앞으로 컴퓨터학원으로 향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예전 만큼 컴퓨터 학원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1980~90년대 흔했던 컴퓨터 프로그래밍 학원은 2000년대 들어 수강생이 줄면서 하나 둘 문을 닫았고, 이제는 대부분 자격증이나 동영상, 홈페이지 개설 등 활용 쪽에 초점을 맞춘 학원들만 남았다. 컴퓨터 학원이 줄어든 것은 열심히 프로그래밍을 배운다 해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갑을병정에서 정에도 못미친다"는 자조적인 말이 시사하듯 대기업 밑으로 하청ㆍ재하청 기업이 줄줄이 엮이는 피라미드 구조의 최하단에 위치한다. 특히 소프트웨어의 가치와 상관없이 임금을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무자처럼 근무시간에 따라 시급으로 지급받는 개발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구조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남는다는 것은 어지간한 결심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요지는 교육이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스티브 잡스는 교육이 만들어 낸 인물이 아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잡스는 제대로 된소프트웨어 교육도 받지 못했다. 애플 설립 초창기에 매킨토시 컴퓨터와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인물은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이었다. 잡스는 일감을 물어오고, 세일즈를 했으며,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사람들이 제품을 통해 사용하기를 원하는 기능들을 기막히게 제시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화적 소양을 기반으로 한 번뜩이는 영감을 제품으로 구현했다.

아직도 제도권 교육을 통해 잡스가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부 관료가 있다면 잡스의 전기를 잘못 읽었거나 의도적으로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잘못 알고 있는 잡스는 이제 그만 잊었으면 좋겠다.

중요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개발자들이 일할 수 있는 풍토다. 각자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쏟아냈을 때 제대로 대접받고 탄탄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 우리 소프트웨어 업계는 그렇지 못하다. 일감을 따내기 위해 여러 단계 하청을 거쳐야 하고, 그렇게 일한 대가마저도 후려치는 구조 속에서는 스티브 잡스도 살아 남기 힘들다. 자칫 잘못하면 제도권 교육을 통해 잡스를 닮은 실업자만 대량 양산 할 수 있다.

산업계 구조를 바꿔야 한다. 환경과 제도의 문제를 수급의 논리로 접근하지 말고, 무엇이 문제인지 보고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정부 창구부터 개설하는 것이 시급하다.

최연진 산업부 차장대우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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