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제동에 거주하는 김영호(가명ㆍ40)씨는 매주 일요일 오후 5시쯤만 되면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최근 방송가에 화제를 몰고 있는 MBC 예능프로그램 '일밤'의 인기 코너 '진짜 사나이'를 보기 위해서다. 유명 연예인들의 병영 생활 체험을 보면서 그는 "우리 때는 저보다 힘들었는데 군대 참 좋아졌네" "나도 유격을 해봤는데 쟤들보단 잘했어"식의 과거 회상이 섞인 방송 평가를 아내와 나누며 일요일 저녁을 보내곤 한다.
'전혀 다른 24시간 관찰 다큐 예능'을 표방한 이 코너는 최근 안방에 몰아친 군대 예능 열풍을 대변한다. 거기에는 군대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의 씁쓸한 현실이 깔려 있다. 군대 예능이 군대 문화의 부정적 요소는 무시한 채 긍정적 인식을 전파하고 우리 사회 속 군대 문화의 재생산에 일조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군대 예능 열풍에 불을 지핀 건 연예ㆍ오락 채널 tvN이 올해 초부터 방송한 '푸른 거탑'이다. 제대를 눈앞에 둔 병장부터 막 군에 발을 들인 이등병까지 군인들이 병영에서 겪는 애환을 과장된 웃음으로 그려낸 이 드라마는 안방에 푸른 제복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봉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라면을 불려먹는 일명 '뽀글이' 등 군대 음식을 소개한 '군푸드', 군 차량을 유명 자동차랑 단순 비교해 웃음을 유발한 '군기어' 등 '푸른 거탑'과 연계된 작은 코너를 tvN이 따로 방송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군대 예능에 나타난 군대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진짜 사나이'의 초기 출연진들이 내세운 '가상 입대' 동기부터가 긍정 일색이다. "초심을 되찾겠다"(배우 류수영), "20대의 열정을 배우겠다"(배우 김수로), "7kg 체중 감량을 통해 건강해지겠다"(개그맨 서경석), "사회 생활을 알고 오겠다"(아이돌 그룹 '엠블랙' 멤버 미르)는 각오들은 군대가 비록 힘든 곳일지라도 심신을 단련하고 사회의 생리를 깨닫는 하나의 준교육기관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다. 군대 예능을 통해 군대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 사회 뿌리 깊이 자리한 극기문화, 집단주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심영섭 대구사이버대학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군대 생활에 적응 잘하는 일부 연예인들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우리가 교육 받아온 남자의 책임 의식, 듬직한 남성성을 발견하는 듯하다"며 "학벌 등 후천적 여건보다 원초적인 능력으로 인정받는 곳이니 예비역들이 강한 향수를 느낄 수 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심 교수는 "특히 '진짜 사나이'에 나오는 호주인 샘 해밍턴의 역할을 주목해야 한다"며 "프랑스 외인부대처럼 외국인도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가치에 순응하고 동조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낸다"고 평가했다.
군대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남성 시청자들의 반응은 다분히 이중적인 면이 있다. "군대 생활했던 곳을 향해선 볼 일도 보지 않겠다." 군 생활을 경험해 본 대부분의 남자들이 한 번쯤 내뱉었을 말이다. 예비역들이 말하길 꿈인 줄 알면서도 식은 땀을 흘린다는 최악의 악몽이 '군대 다시 가는 꿈'이기도 하다. 군대라면 이를 가는 이들이 술자리에서 군대 생활의 영웅담을 안주로 곧잘 입에 올리고 안방에서 군대 예능을 반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기억의 재구성'을 이유로 든다. "보통 사람은 괴로웠던 과거를 떠올릴 때도 좋았던 부분만 기억하고 향수에 젖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 입장에선 군 복무 기간이 힘든 시기이기도 하지만 끈끈한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던 시절이라 좀 더 긍정적으로 기억하려 한다는 분석이다. 계급으로 상징되는 숨막히는 위계 질서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고생담을 되새기며 현실의 어려움에서 도피하려는 집단 심리도 군대 예능에 힘을 보탠다. 윤 교수는 "사실성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들이라 동일시가 더 가능하고 훨씬 더 환상에 빠지도록 한다"고도 풀이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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