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내 삶 떠나 살아 보고 싶은 욕망이 나를 여행하게 하는 이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내 삶 떠나 살아 보고 싶은 욕망이 나를 여행하게 하는 이유"

입력
2013.08.16 11:29
0 0

'첫날 아침, 후다닥 깼는데,/ 아차! 늦잠을 잤구나 조마조마해하며 창문을 열었는데 바다인 거야. 햇살이 나비처럼 내려앉고 있더라고./ 그제야 알았지. 난 여행을 떠나온 거야. 눈물이 핑 돌더라고. 글쎄.'((예담ㆍ2007)에 붙인 자서(自序))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지구의 종말이 반복된다고 여기는 월급쟁이, 수험생, 또는 그들을 부러워하는 백수에게, 여행으로 밥 벌어먹는 일상이란, 일상이라기보단 중력을 여읜 판타지 같은 것이어서, 참혹하도록 부러울 따름이다. 얼마나 좋을까. 최갑수(40)씨를 만나서 물어봤다. 그는 시인이고 오랫동안 기자였는데 지금은 그저 여행을 다닌다. 그걸로 12월에 태어날 셋째까지 다섯 식구가 먹고 사는 전업 여행작가다.

"아침 다섯 시 반에 일어나. 한 시간 자전거 타고, 밥 먹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일곱 시지. 그때부터 오로지 일이야. 집중해서. 여행? 출장 가는 거 말이지? 출장 갈 때도 일거리를 싸 갖고 가. 딱, 딱, 시간 맞춰서 납품해 줘야 하니까. 그것도 편집자가 척 보면 도비라('표제지'를 뜻하는 출판 은어)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퀄리티로."

여행작가라는 직업에 로망을 갖고 있었다면 이런 얘기는 반전일 수 있겠다. '와호장룡'에서 주윤발이 대나무 우듬지를 딛는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 궁궐 뒤뜰에 백 년 동안 닫아둔 우물의 수면 같은 그윽한 눈빛, 그런 아우라는 당신이 어디선가 마주쳤을지도 모를 여행작가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런 데 와서까지 왜 저러지…' 싶었던 이들이 여행작가일 가능성이 크다. 시간에 쫓겨 달리고, 묻고, 카메라를 들이대고, 하다가 성에 안 차면 욕까지 내뱉는 그들. 여행작가의 여행은 대개 우아하지 않다.

"그렇게들 많이 묻지. 여행을 일로 삼으니까 얼마나 좋냐고. 이렇게 대답해. 일은 즐거워지고, 여행은 ○○게 피곤해졌다고."

여행작가가 으레 그렇듯 최씨도 여행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 따윈 없었다. 대학 재학 시절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덜컥 시인의 타이틀이 씌워졌고, 추측하건대 그것이 여러 직장에서 거듭 사표를 던지게 만든 도도한 자존감의 뒷심이었을 텐데, 마지막에서 두 번째였던 직장에서 사표를 반려한 상사가 제안한 역할 가운데 우연히도 레저 담당 기자가 있었다. 운전을 배운 것도, 똑딱이 카메라를 산 것도 그때가 처음. 따지고 보면 남들의 두세 배 되는 노동량이었다. 하지만 그는 매주 돌아오는 2박 3일의 자유(출장)를 선택했다.

"여행이란 게 시 쓰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아.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거잖아. 여행 원고를 쓰는 것이나 사진을 찍는 것도 찰나를 포착하는 일이지. 그 과정이, 난 늘 재미있어. 근데 나이가 차니까 회사에서 (현장을 떠나) 데스크를 보라고 그러더라고. 연봉 협상 때 콱 질렀지. 천만 원 더 주거나 일 년에 여섯 번 해외 취재를 보장해 달라고. 당연히, 안 받아들여졌지."

프리랜서가 되고 첫 달 수입은 이십만 원이었다. 코흘리개 아들의 저금통을 뜯어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 아들이 내년에 중학교에 들어가는데, A급 대우를 받는 지금은 직장인 동년배만큼은 번다. 그 시간 동안 여행은 그의 엄혹한 생업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채운 생업의 흔적들, 여행작가 최갑수의 글과 사진들은 어쩌자고 그토록 센티멘털한 것일까. 그 까닭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말이 꼬여서 '여행을 왜 하냐는', 문답무용(問答無用)의 질문이 되고 말았나 보다.

"은희경 작가도 그랬잖아. 여행, 별 거 없더라, 딴 데 가서 똥 누고 오는 거더라. 글쎄… 진짜 여행을 왜 할까? 여행을 떠나고픈 충동이 생긴다는 것은, 일상이 힘들고 짜증난다는 얘기겠지. 내가 내 삶을 떠나서 살아보고 싶은 욕망 말이야. 여행작가인 나도 미치도록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어. 경기도 파주시 한빛로 ○○번지에 사는 최갑수랑 제주도 다랑쉬 오름에 오른 최갑수는 다른 인간일 거야. 그리고 삶의 번민이 있을 때, 일상의 공간보다는 여행지에서 내린 결정이 낫다고 생각해. 적어도 나는 그랬어."

그의 여행기엔 기승전결이 없다. 오래 입어 물 빠진 청바지 같은 채도의 사진과 쉼 없이 궤도를 도는 위성의 원심력에 끌리는 듯한 문장들. 그것들은 '가본 것 같다'는 기시감보다는 '가보고 싶어 미치겠다'는 조바심을 한껏 일으킨다. 그 조바심을 못 버티고 정주하는 삶을 기꺼이 포기한 사람들이 아마도 여행작가일 것이다. 최씨는 최근 새로 쓴 그의 첫 책()에 이렇게 썼다. '조리개 2.8과 22 사이에서, 셔터 스피드 4분의 1초와 500분의 1초 사이에서, 봄과 겨울 사이에서, 산과 바다 사이에서, 나는 두근거렸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