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잖아 없어질 13층 건물을 글을 쓰는 동안에도 한 층 한 층 어루만지고 올려다본 후 들어왔다." 한국일보가 중학동을 떠나 지금의 한진빌딩에 세 들던 날, 그 신문의 임철순 주필이 남기고 떠난 비장한 칼럼이다. 오죽 서글펐으면 글을 잇지 못해 건물 구석구석을 헤맸을까. 글의 비장이 지나쳐 자칫 불길의 예고로까지 내게 읽혔던 건 그 신문이 6년 너머까지 표류, 그 와중에 임 주필마저 중학동을 못 딛고 정년 퇴임한 것으로도 입증된다.
그의 입사동기로 작가가 된 김훈의 퇴사는 비장보다는 비정에 가깝다. 수습시절 "밖에서 본 한국일보, 안에서 본 한국일보를 쓰라"는 사측 앙케트에 그는 "한국일보를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응답, 15년 후의 퇴사로 그 약속을 칼같이 지켰다. 또 한 명의 동기 박흥진(할리우드 골든 글로브상 심사위원)의 퇴사 요인은 좌절이었다. 계엄시절 물 묻은 신문대장 들고 권총 찬 검열 장교 앞에 설 때마다 짓누르던 굴욕감을 못 견뎌 LA로 도망친 것이다. 선배 되는 나를 만나 털어놓는 그의 술회는 늘 같다. "형, 오히려 그 때의 짜릿한 마조히즘이 그립소."
어찌 이들 기수만의 좌절일까. 나의 좌절, 나의 사퇴를 말할 차례다. 파리특파원 시절, 서울본사로부터 베이루트로 당장 진격하라는 취재지시가 떨어졌다. 현지외교관 도재승씨가 아랍 무장괴한들한테 납치된 것이다. 한국인에겐 베이루트 비자가 아예 발급되지 않던 시절임에도 드골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무비자 탑승을 거부하는 에어프랑스 여자카운터한테 "특파원은 비자 없이도 탑승 가능하다"고 속여 막무가내로 탑승, 경유지 쿠웨이트 공항의 보세구역에 내려 현지 박종상 대사를 꼭두새벽 불러냈다. 내게 현지비자(spot visa)를 발급토록 베이루트 측에 외교적 절충을 당부, 천신만고 끝에 입국했다. 열흘 남짓 종횡무진, 하루 평균 신문 두 페이지 분량의 기사를 전화송고 후 파리로 돌아온즉 사장실 발 전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제전화 값이 150만원 나온 경위를 사유서 붙여 직보할 것" 으음! 숨이 막혔다.
좌절은 취재현장에서도 닥친다.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9년의 일이다. 이번엔 파키스탄에 진격, 신임 부토 여 총리를 인터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 인터뷰를 신청한즉 순위가 415번째였다. 총리대변인을 만나 거칠게 따진즉 부하직원들이 안 보이는 옆 사무실로 나를 안내하더니 기대 밖의 정보를 준다. 부토가 그날 밤 비행기로 고향 카라치의 향민대회에 내려간다는 극비정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호텔로 돌아와 짐을 꾸려 공항을 향해 택시에 오르려는 순간 아차, 서울의 한 일간지 기자가 호텔에 들어서잖은가! 따돌려?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20년 넘는 기자생활, 더구나 5년 남짓 파리에서 유유자적해 온 나의 철학은 결국 '도리' 쪽을 택했다. 거북아, 잠자는 토끼를 깨워야지!
카라치에 내려 둘은 군중 속에 파고들었다. 나는 그가 부토와 인터뷰하는 사진을 날렵하게 몇 장 찍었으나 그 북새통 속에서 카메라를 도둑맞았다. 누군가 부토와의 대담장면을 찍어주겠다고 자원하기에 카메라를 줬더니 찍는 척하고는 군중 속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더 환장할 일은, 그 장면을 지켜보던 상대기자가 표변, 나의 인터뷰를 한사코 안 찍었다고 우기는 것 아닌가! 그런 그를 달래고 달래 현지 AP통신 사무실에 들러 필름을 현상한즉 브라보! 거기 나의 인터뷰 장면이 그대로 한 컷 들어 있잖은가! 더 신나는 일은, 필름 현상을 도운 AP스트링거가 찍은 필름 속에 상대기자의 인터뷰 장면도 들어있었다. 서로 손잡고 골인한 셈이다. 그 기자와 헤어져 호텔로 돌아왔다. 옷 입은 채 침대에 벌렁 누웠다. 아, 이 가증한 직업을 난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파리로 돌아와 아내와 두 놈을 꼭 껴안고 서울행 대한항공에 올라, 두 달 후 한국일보와 결별했다. 들추고 싶지 않던 이야기를 오늘 공개함은 58일간의 생고생을 치른 후배기자들을 달래려는 작은 위로에서다. 아, 한국일보! 우리가 어떻게 일군 신문사였던가!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swkim43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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