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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씩 따라 걸으면… 방 안에 펼쳐지는 갠지스강·프로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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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씩 따라 걸으면… 방 안에 펼쳐지는 갠지스강·프로방스

입력
2013.08.16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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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아닌 어딘가를 매일 꿈꾸는 Y… 책 속으로 떠난 '5일짜리 패키지 여행'인도에서 죽음과 육체 응시하며 "지지 않으려 떠나다"의 의미 생각하고하루키와 손잡고 로마·아테네 거닐며 증기에 쏘인 듯 부은 뇌로 낄낄거리고카뮈 따라 프로방스 햇살에 뼈를 데우고 로르카처럼 안달루시아의 우수에 젖고인천공항서 설렘의 미립자를 흡입하다

폭염, 이라는 두 글자를 쓰고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땀이 흐른다. 여름 휴가는 이미 다녀왔다. 그래도 떠나고 싶다는 열망과 이젠 떠날 수 없다는 체념이 충돌한다. 그 에너지가 체감온도를 더 높이는 아이러니.

여전한 여행의 갈증과 충동으로 막바지 무더위가 힘겨운 이들을 위해 한국일보 출판팀이 다시 떠나는 여름 휴가를 제안한다. 서울에서 인도를 거쳐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를 두루 훑는 5일짜리 알짜배기 패키지 상품이다. 물리적으로 5일이 다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 하루라도 좋다. 아직 충분히 떠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이번엔 방 안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여행 대신 여행서다. / 편집자 주

Y는 지금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적요와 침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12년간의 직장생활은 Y에게 독신자의 아늑한 아파트와 매해 여름이면 비행기 티켓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 유행과 세태에서 한 발짝 떨어져 보다 고급스런 지적 취향을 추구할 수 있는 댄디의 제스처를 허락했다. 그 밖에 Y는 무엇을 얻었나. 인간에 관한 염오(染汚), 세계를 향한 권태, 관계에 대한 냉소. 무엇보다 이 즈음 Y를 사로잡고 있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행복은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낙관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떠났으나, 언제나 실망했다.

열대야의 한복판에서 Y는 문득 수 년 전 읽은 알랭 드 보통의 문장들을 떠올렸다.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 J.K.위스망스의 소설 의 주인공 데제생트 공작은 평생 해외 여행을 하지 않고 "여행의 가장 훌륭한 측면, 즉 여행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물건들로 주변을 꾸며놓고" 살았다. Y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반짝 했고, 그는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창고 속에서 텐트를 꺼냈다. 여행용 캐리어와 페도라 모자, 선글라스도 죄다 끄집어냈다. 5일간의 일정표를 짜고, 서가를 거닐며 어울리는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홀로이므로 이런 짓쯤은 얼마든지 해도 좋다고 짓궂게 웃으며, Y는 배경 음악도 준비했다. 김동률의 '출발'이 흘러나온다.

◆1일째: 인도 "나는 걸었다, 세계는 좋았다"

어떤 책들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후지와라 신야의 문장이 그랬다. "나는 걸었다. 세계는 좋았다. 좋게도 나쁘게도, 모든 것은 좋았다." 만 2세 유아어의 어휘로 압축한 이 진리 명제에 Y는 압도되었다.

후지와라 신야의 첫 책 (작가정신)은 1972년 일본에서 출간됐다. 당시 후지와라는 스물넷이었고, 멀쩡한 대학을 뛰쳐나와 세계 방랑길에 올랐다. Y는 인도 같은 여행지를 영성의 대지로 추켜세우는 자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인도 여행 대중화의 물꼬를 튼 후지와라도 말하지 않는가. "인도나 티베트를 다녀와서 신비를 팔아먹는 것은 일종의 사기입니다. 명상이란 것도, 신이란 말도 좋아하지 않아요. 명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 여행을 관통하는 하나의 풍경은 갠지스 강 위를 떠다니는 시체와 그 시체들을 태우는 화장장의 잿더미다. 거의 모든 저서를 갱지에 인쇄하는 후지와라의 이 책에선 어쩐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취가 풍기는 것도 같다.

여행작가와 사진작가의 명성이 제각각 으뜸을 주장하는 후지와라에게 사진은 그 자체로여행의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인도란 나라는 어디를 찍어도 사진이 되므로 인도는 '무엇을 찍지 않을 것인가' 하는 마이너스 작업에 의해서만 그 사람의 시점이 드러난다." 후지와라는 수많은 시신의 사진을 찍었으면서도(심지어 불타고 일부만 남은 시신까지) 나병이나 콜레라 환자, 아사자 같은 시신들은 단 한 번도 찍지 않았다. 의식해서 규제했던 건 아니다. 다만 시신에 대한 어떤 모랄리티가 작용했을 뿐이다.

"내 시신을 좋은 곳으로 가져가고 싶다. 한 수행승이 바라나시 강가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을 온종일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이 문장을 읽으며 Y는 자신의 육체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죽음 이후의 육체란 소각의 대상이어도 마땅하다는 게 Y의 지론이지만, 육체야말로 Y가 일평생 사랑하고 증오하고 행복하고 환멸했던 유일한 물적 증거라고 생각하니 그 또한 위악은 아닌가 싶다.

후지와라는 십수년이 지난 후 젊은이들에게 왜 그때 인도로 떠났는지를 묻는 질문을 받는다.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온갖 것들에게 엉망으로 지기 위해서 갔던 게 아닐까." Y는 어느 것에도 지지 않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세계는 좋았다, 고 Y는 말할 수 있을까. 산다는 건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 저 한 문장을 말하기 위한 것 아닐까, Y는 생각했다.

◆2일째: 그리스ㆍ이탈리아 "이국에서 철저하게 고독하기"

Y는 새로운 여행지로 떠날 채비를 마치고 책장을 스르륵 넘겼다. 깜짝 놀랐다. 지난 독서가 그토록 즐거웠던 오늘의 책에 밑줄의 흔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줄 치기 위해 읽는 책이 아니라 낄낄거리며 웃기 위해 읽는 책이었지.

(문학사상사)는 서른 여덟의 하루키가 마흔을 앞둔 위기감 속에 불현듯 유럽으로 떠나 보낸 3년간의 체류의 기록이다. 가까스로 젊은 시절이었고, 이 때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다. 철저하게 고독하기 위해 이국으로 떠난 그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산 그 3년간 와 를 썼다. 원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거두는 삶을 향한 질투가 Y의 보잘것없는 내면에서 솟는다.

남유럽에서의 삶이란 막무가내의 나태와 긍정주의에 처절하게 깨지는 것을 의미한다. 열차는 결코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않고, 우편물은 절대 유효기간 안에 당도하지 않는다. "증기에 쏘인 듯 뇌가 부은 느낌"으로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유머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머가 있다. 뇌가 부어도 유머가 있으면 인간은 살 수가 있다.

하루키는 에서 그 유명한 말을 했다.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소설이 10만부 팔리고 있을 때는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호감을 받으며 지지를 얻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가 백 몇 십만 부나 팔리고 나자, 나는 굉장히 고독했다. 그리고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런 사랑은 받아본 적도 없지만, Y는 어쩐지 자신이 그 말을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루키와 로마 아테네 미코노스 시실리 잘츠부르크를 돌고 난 Y는 이날 밤 굉장한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꿈을 지배할 수 있다.' 그는 놀랍게도 꿈 속에서 미코노스 섬의 하얀 벽돌집들 사이를 거닐며 푸른 지중해를 내다보고 있었다. 자기 전엔 무조건 여행서를 읽어야 한다.

◆3일째: 프랑스 프로방스 "시와 산문 사이"

오늘은 프로방스. Y는 이 책을 읽기 위해 멜론 한 덩이와 지공다스 와인, 약간의 치즈까지 사다 두었다. 김화영 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가 지난달 펴낸 프로방스 여행기인 (문학동네)이다. 이 책은 김화영의 첫 산문집이자 국내 첫 프로방스 여행기라 할 수 있는 (1975년) 후속편이다. 40년의 시차를 둔 두 책은 공간에 대한 여행기일 뿐 아니라 한 인간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시간에 대한 여행기이기도 하다. "이십대 후반과 삼십대 초반 내 젊은 시절의 모든 우울과 기쁨이 깃들어 있는 광장과 분수"에 이제는 장성한 딸과 그 딸이 낳은 손자를 데리고 다시 선 노학자의 모습이 어쩐지 벅차면서도 슬프다.

동시에 이 책은 프랑스 문학으로의 여행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단연 알베르 카뮈와 함께 하는 여행이다. "무엇인가 늘 용서받아야 할 것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의 파리 지식인 사회를 떠난 카뮈는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루르마랭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그는 을 썼고,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에게"라는 헌사와 함께 문맹의 어머니에게 바쳤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죽음." 그러나 프로방스의 햇살은 카뮈의 말마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뼈를 따뜻하게 데워준다."

진지하고도 치열한 문학적 사색이 이어지는 새벽 4시, 김화영에게 드르륵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BYC 신설점. 회원 대상 10% DC." Y의 허리가 고꾸라진다. 웃음이 폭발한다. 저자는 천연덕스럽게 읊조린다. "산문적인 너무나도 산문적인."

◆4일째: 스페인 안달루시아 "문장의 오랜 골목들을 거닐다"

집시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배어 있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 Y는 가본 적이 있다. '코르도바. 멀고 외로운'으로 시작하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 '기수의 노래' 때문이었다. 과달키비르강이 흐르는 이슬람 도시 코르도바는 Y의 첫 휴가지였고, 그 도시의 대표적 유적지인 메스키타의 파티오(중정)에서 Y는 처음으로 오렌지나무를 보았다.

"독자 제위. 여러분이 이 책을 덮는 순간 안개와도 같은 우수가 마음속을 뒤덮을 것이다." 로르카는 시인도 되기 전에 펴낸 그의 첫 책 을 이런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스무살의 로르카는 "고독은 정신을 다듬는 위대한 조각가"라고 믿는다. 덕분에 이 안달루시아 여행기는 시종 쓸쓸하다. 갈리시아의 고아원에 간 청년 로르카는 현관문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불안하게 서성이다?몰래 자기 아이들을 내버리고 가버린 유령 같은 인간들의 모습을, 나직한 이 현관문은 말없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가엾은 인간들을 보며 속울음을 삼켰을 이 문이 갑자기 애처롭게 느껴진다."어디선가 집시의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5일째: 인천국제공항 "설렘의 미립자로 가득한"

마지막 날 아침, Y는 문득 공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국제공항의 대기에 균일한 농도로 살포돼 있는 설렘의 미립자를 폐 한가득 흡입해줘야만 이 여행이 제대로 끝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알랭 드 보통의 을 골라든 건 그 때문이다.

때마침 이 책에는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분노의 뿌리는 희망"이라는 명제가 인용돼 있다.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하여, 존재에 풍토병처럼 따라다니는 좌절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한다."Y는 급하게 공항버스 스케줄을 체크한다. 점심과 저녁을 공항 라운지의 식당에서 먹으며 비행기의 이착륙을 지켜볼 참이다. Y는 서두른다. 일단 버스를 놓치지 않아야 분노를 하지 않을 테니까.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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