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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도 불안도 '비밀'이 만들어 낸 생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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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도 불안도 '비밀'이 만들어 낸 생채기

입력
2013.08.1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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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고, 1939년 식민지 조선의 소설가 이상은 썼다. 자아의 내밀한 정체성을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비밀은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유하다.

이상이 선취한 이 현대적 주제를 소설가 편혜영(41)이 고요하되 집요한 시선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3년간 쓴 8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 을 통해서다. 가산을 거덜 낸 아들 때문에 철거촌 아파트에 홀로 버려진 노모('야행'), 성추행 가해자에서 무고죄 피해자로 완벽하게 위장한 중년 남자('밤의 마침'), 말년을 함께 보내자며 찾아온 눈이 멀어가는 여동생을 몰래 요양원에 버리고 오는 독거 노인('비밀의 호의')…. 이들의 한결같은 고독은 모두 그들이 품은 비밀 탓이다.

노모가 외로운 것은 "아무리 되돌아봐도 일생을 통틀어 지킬 만한 비밀이 없는 시시한 인생이라는 것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비밀"이었기 때문이고, 중년 남자가 스스로를 모멸하는 것은 죄의 무화를 위해 영원히 불안하고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삶을 선택한 대가이며, 노인이 말 많은 여동생에게 분노한 것은 그의 폭로된 비밀이 남들에게는 한낱 추문이거나 시시한 가십이었다는 충격 때문이다. 비밀이란 결국 한 인간의 존재론적 동기인 셈이다.

2000년 등단한 이래 건조하고 팽팽한 문장으로 일상에 잠복한 불안과 공포를 날카롭게 포착해 온 이 냉정한 작가는 이번 소설들에서도 자로 잰 듯 정확한 문장으로 생을 감싸는 허위와 위선의 척수막을 찢는다. 그런데 찢어진 척수막 사이로 흘러내리는 생의 액체가 뜻밖에 뜨겁고 끈적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육중한 평정심'을 잃지 않는 편혜영의 화자에게 이것은 새로운 사건이다.

실종됐던 아이가 사체로 발견된 후 극심한 고통에 빠져 지내던 M은 남편의 권유로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들의 모임에 나간다.('해물 1킬로그램') "슬퍼 보이는 것이 언제나 이득"이 되는 이 모임에서 M은 이곳의 여자들이 유사한 고통을 저마다 개별적으로 겪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자신의 일부가 훼손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M은 그동안 자신의 고통을 유일한 것으로 치켜세움으로써 고통을 견뎌왔"기 때문이다. 남편과의 임박한 파국을 모른 체하며 무기력하게 살아온 M은 할 말이 있다는 남편을 만나러 나가는 길에 우연히 같은 모임의 K를 미행하게 되고, K를 좇아 시장통을 헤매던 M은 결국 남편을 만나러 가지 않는다. 대신 남편의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물이 뚝뚝 떨어지는 해물찜 재료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편혜영의 소설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의구심은 삶과의 관계가 냉랭하기만 했던 '개룡남'(개천에서 용 된 남자)의 돌연한 연애 도전기를 그린 '가장 처음의 일'에서 확증으로 굳어진다. 이 소설은 아름답다. 편혜영이어서 조마조마했던 마지막 두세 페이지를 넘기고,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 조바심 쳤던 마음에 마침내 뜨거운 피가 퍼질 때, 독자는 한 작가를 꾸준히 따라 읽는 일의 깊은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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