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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8월 16일] 음주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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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8월 16일] 음주유감

입력
2013.08.1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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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유로 술자리가 많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영화동료나 친구들과 술자리가 벌어진다. 이쯤 되니 술자리가 좋은 건지 아니면 술 자체가 좋은 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아 늦게까지 술을 마시지는 못해도 항상 취해있다는 게 문제다.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온 후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전화기 통화목록을 보는 일이다. 만취하면 같이 작업한 동료나 배우들에게 전화를 하고는 고맙다는 둥 보고 싶다는 둥 아침에 일어나서 기억도 못할 말들을 늘어놓기가 일쑤고, 약속을 잡아놓고도 정작 약속 당일엔 기억 못해서 낭패를 본 이후로는 전화기를 꺼놓게 되었다.

그리고 지갑에 있는 신용카드 전표를 보게 된다. '아, 내가 1차로 인사동 막걸리집에서 누구와 마셨고, 2차로는 바비큐 치킨집에서 맥주로 입가심을 했구나'하며 지난밤을 되짚어본다. 그런데 1차에서 만난 사람도, 그 대화도 기억이 나지만 2, 3차에서 만났을 사람들에 대해선 깜깜하다. 다음날 한 후배는 "형 잘 들어가셨죠? 제가 부탁한 것 꼭 신경 써주세요"라고 하는데, 그 후배가 뭘 부탁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아 되묻게 되는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되도록 술자리는 1차에서 끝내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심각하게 금주를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기분 좋게 영화동료들과 술을 마신 뒤 택시를 타고 집에 오게 되었다. 역시나 차에 타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기사님이 "손님, 여기 근처 같은데 댁이 어디세요?"라며 잠을 깨웠다. 신기하게도 바로 집 앞이었다. 감사한 마음에 평소보다 5,000원을 더 얹어서 요금을 계산했다. 그리곤 기사님에게 "차를 이곳에 주차해달라"며 키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분의 얼굴색이 이상하게 변했다. 팁이 적어서 그런가 하고 만원을 채워 드리곤 눈짓으로 키를 달라 했다. 그러자 그 기사님은 "이거 택시인데 왜 키를 달라고 하냐"며 황당해 했다. '아, 지금 내가 대리운전으로 온 게 아니구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금주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정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얼마 전이다. 그날도 친구들과 기분 좋게 한 잔을 하고 새벽 2시가 넘어 집으로 귀가하게 되었다. 70세가 넘은 부모님은 이미 주무시고 계신 시간이라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데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번호들을 이리저리 눌러보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취기가 올라와 몸을 빨리 뉘이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한번 상상해보시라. 술에 취한 중년의 남자가 현관에 기대서서 '삐삐삐삑…' 번호를 눌러대는 모습을. 30여분간 알고 있는 모든 번호를 다 눌러봤는데도 일치하는 번호가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벨을 눌렀다. 주무시던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어주시면서 나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고 이놈아! 술 좀 작작 마셔라.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죄송하다며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지만 너무나 창피해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술이 좋고 사람이 좋지만, 과유불급이라고 이젠 좀 자제해야겠다.

하지만 신기한 게 하나 있다. 집에 어떻게 왔는지, 무슨 차를 타고 왔는지, 어디서 차를 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도, 단 한번도 집을 못 찾아온 적은 없다. 항상 어디에서든 집을 제대로 찾는다는 건 참으로 신기하다. 지금 방향을 잃어 헤매고 있는 시나리오들을 술병에 담아두면 제대로 자기 집을 찾아오려나.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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