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담서원이 세 들어있는 건물 주인으로부터 "나가주세요"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월세를 올려달라는 말씀이 있을 줄은 각오하고 얼마를 올려 달라 하실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내왔습니다만… 내 집 없는 길담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새로운 둥지를 지을 수 있을지, 당장은 멍하네요. 병은 자랑하랬다고, 고민을 움켜 안고 있기보다 이렇게 허심하게 풀어놓습니다.'
'길담서원'이 건물주로부터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이 SNS를 통해 전해져 왔다. 길담서원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보니, 위와 같은 운영자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지역에 자생적으로 생겨난 문화공간들이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비싼 임대료에 치여 이전하거나 아예 사라지는 일이 '서촌'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를, 일어나더라도 더디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글을 지난 5월 이 지면에 썼다. 그런데 서촌의 대표적인 문화공간 가운데 하나인 길담서원이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것이다.
종로구 통인동의 골목에 자리한 길담서원은 대로변에서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찾아 들기가 쉽지 않다. '병산'이나 '도산'에 붙는 '서원'이라는 큰 이름과 걸맞지 않게, 식당들에 둘러싸인 작은 현대식 건물 1층에 자리한 것도 이유다. 하지만 서원이라는 이름의 규모는 외형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다.
전국의 중소서점들이 연이어 스러지는 시대에 대형서점인 교보문고가 지척인 곳에서 버젓이 문을 연 배포가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는데, 더구나 인문학이라니. 2008년 문을 연 초기에는 그래도 그저 동네서점 겸 찻집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해를 거듭해가면서 독특한 행보가 뚜렷해져 갔다. 인문학 책 읽기 모임이 시작되더니 영어원서와 프랑스어문, 철학을 공부하는 모임이 생겨났다. 책을 사려는 사람들 외에도 공부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청소년인문학교실이 생기면서는 청소년들이 들고 났고, 다양한 분야 인사들의 강연이 줄을 이었다. 연주회가 열렸으며, 20평 남짓한 공간 한쪽에 '한뼘미술관'이란 당당한 이름을 걸고 전시들이 이루어졌다. 가히 복합문화공간이었고,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이 길담서원 운영자가 아닌 이용자인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꾸려진다는 점에서는 자율적 문화공동체이기도 했다.
서원들이 자리해 있는 저 옛날 향촌 선비들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동네에 길담서원이 있어서 즐거웠다. 오다가다 들러서 책을 사고 전시를 보는 정도였지만, 언젠가는 시간을 내 공부모임에 참여해보리라는 계획도 품고 있었다. 누군가 서촌에서 가 볼만한 곳을 물어오면 빼놓지 않고 그곳을 꼽았다.
길담서원의 사연이 올려지기 며칠 전인 7월 15일에는, 종로구가 종로문화재단을 설립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정책 개발 및 교류' '도서관, 미술관, 공연장 등 문화시설의 운영 및 관리' 등이 주요사업이라는 것과 '윤동주문학관과 박노수미술관, 부암동 전통문화시설(가칭)을 통합 운영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부암동의 오진암까지 종로구가 확보한 '집'들에 종로문화재단이 문화적 내용들을 채우거나 운영해나갈 모양이라고 읽혔다.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개개인들이 스스로 좋아서 만들고 공들여 일구어낸 문화와 문화공간들은, 공공기관이나 재단 같은 단체에서 '정책개발'로 생산해 낼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새로 만들어내는 것 못지않게, 이미 자생적으로 만들어져 의미 있는 역할을 해나가고 있는 작은 문화공간들 역시 놓치지 않고 보듬어야 할 자산이 아닐까.
서원지기가 길담서원 인터넷카페에 올린 글의 마지막 문구는 이렇게 끝난다.
''길담'이니까 '길'은 있겠지요. '담'으로 둘린 아늑한 집이 어딘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길담의 벗들이여, 지혜를 나누어주십시오.'
소프트웨어는 이미 훌륭하다. 5,000명이 넘는 카페회원은 차치하고라도, 길에서 만나면 '길담이 없어진대요'로 말문을 여는 동네 사람들,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SNS 문자들을 보더라도, 길담은 잘 해왔다. 다만 '집'이 없을 뿐이다. 예술과 문화와 인문학이, 상업과 현실에 밀려나지 않아도 되는 그 '아늑한' 집이.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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