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애플의 아이폰이 나오기 전까지 블랙베리는 대단한 스마트폰이었다. 컴퓨터 자판을 연상시키는 '쿼티'자판도 독특했고, 미 육군 등 군사ㆍ정보파트가 애용할 만큼 보안성도 뛰어났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블랙베리를 쓰자 '오바마폰'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한때는 업무용 스마트폰 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1위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하지만 애플에 밀리고, 삼성전자에 치이면서 블랙베리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장에 매물로 나오게 됐다.
캐나다에 본사를 둔 블랙베리는 12일(현지시간) 긴급이사회를 열어 회사 매각방침을 발표했다. 회사 관계자는 "경영난 타개를 위해 매각이든 합작회사 설립이나 제휴든 다각적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블랙베리의 몰락을 '갈라파고스의 비극'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립된 섬 갈라파고스처럼, 블랙베리는 글로벌 IT환경과 격리되고 단절된 채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다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실 블랙베리의 쿼티자판은 상당히 혁신적인 장치였다. 특히 이메일이나 문서작업에는 탁월한 비교우위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개방성이었다. 스마트폰의 최대 강점은 응용소프트웨어(앱)를 내려 받아 활용하고 즐기는 것인데, 블랙베리는 그게 불가능했다. 한동안 앱도 없고, 앱을 파는 장터도 없었다. 업계 관계자는 "블랙베리는 스마트폰의 개념 자체를 잘못 이해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의 힘은 운영체계(OS)에서 나온다. 애플은 자체 OS(iOS)를 갖고 있었고, 삼성전자 LG전자 등 그렇지 못한 회사들은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빌려 썼다. 하지만 블랙베리는 끝까지 자체 OS, 앱도 부족한 OS를 고집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제대로 된 자체 OS가 없으면 안드로이드 등 좋은 OS를 가져다 쓰면 되는데 블랙베리는 그러지 않았다"며 "자기 것만 고집하는 갈라파고스 증후군이야말로 블랙베리의 가장 큰 몰락이유"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연구인력 축소도 블랙베리의 몰락을 재촉했다. 판매가 부진해지자 구조조정을 통해 연구인력을 줄였는데, 그러다 보니 혁신적 제품을 만드는 건 점점 더 불가능해졌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각종 전자부품 등 하드웨어에서 수직계열화가 가능하고 애플은 막강한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갖춘 반면 블랙베리는 두 가지 모두 내세울 만한 요인이 없었다는 점에서 경쟁력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블랙베리는 위기 돌파를 위해 올해 초 신제품 '블랙베리Z10'을 내놓고, 지난달 사명도 기존의 리서치인모션(RIM)에서 블랙베리로 바꾸었으나 시장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블랙베리의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1분기 7.2%에서 올 2분기 2.8%까지 곤두박질쳤다.
현재로선 스마트폰의 매력 자체가 떨어져 매각도 쉽지 않을 전망. 레노버, ZTE 등 중국 기업들 정도가 눈독을 들일 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캐나다정부는 첨단기술 유출을 우려해 중국 기업의 인수를 꺼릴 가능성이 있다. 한때는 글로벌 시장의 돌풍주역이었던 블랙베리는 매각조차 수월치 않은 비운을 맞고 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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