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을 규탄하는 촛불 민심이 예사롭지 않다. 숨 막히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촛불 집회에 참석하는 국민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제6차 범국민 촛불문화제'가 열린 10일 저녁 서울시청 앞 광장은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민주당 등 야권이 적극적으로 촛불 집회에 나선 것도 참석자들이 급증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눈 여겨 볼 대목은 단순히 참석자 수만 늘어난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동원되지 않은 보통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최근 정부 여당의 세제 개편안으로 부담이 늘어난 중산층과 서민들이 그 불만을 집회 참석으로 표출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국정원의 대선개입이라는 국기문란 사건이 터진 지가 한참 됐는데도 진상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 현실이 국민의 분노를 키우는 본질적 이유라 할 수 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은데도 여당과 청와대는 무심한 대응, 장외투쟁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 12일의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국론 분열을 부추기는 구시대적 발상" "촛불은 야당을 태우고 정치에 큰 화상을 입히는 것"이라는 당직자들의 날 선 발언이 무성했다. 촛불 집회 하루 전인 9일 "3류 거리정치" "국정원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대선불복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미리 쏟아낸 새누리당 주요당직자회의의 흐름 그대로였다.
원론적으로는 새누리당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다. 정당과 의원들이 국회 대신 길거리를 택한 장외투쟁이 후진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야당의 장외투쟁에는 여당과 청와대의 무심하고 오만한 자세가 한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국가정보기관이 정치적 중립 의무를 저버리고 대선에 개입했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우선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정원을 개혁해야 하는 게 수순이다. 문제는 그 첫 단계인 진상규명부터 여권의 비협조로 질척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해온 원칙의 정치와도 맞지 않는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고, 바꾸면 될 일이다. 박 대통령과 여당이 진상규명과 국정원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면 오히려 국민 지지는 올라갈 것이며, 그게 나라의 미래에도 도움될 것이다.
국민들은 8년 전인 2005년 당시 야당 총재였던 박 대통령이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며 무려 6개월이나 장외투쟁을 벌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장외투쟁 비난만으로는 본질을 덮을 수는 없다. 더 늦기 전에 진상 규명과 국정원 개혁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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