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경제를 양지로 끌어내려는 박근혜 정부의 노력이 거센 반격에 직면했다. 거액 자산가, 고소득ㆍ전문직 종사자, 자영업자 등 상대적으로 소득을 숨기기 쉬운 집단을 중심으로 세무 당국의 추적을 뿌리치려는 두뇌싸움이 치열해지면서 오히려 지하경제가 확대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 증상은 민간 소비의 증가에도 불구, 부가가치세 징수액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11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민간소비는 전년 대비 1.5% 증가했으며, 4월과 5월에도 소매판매가 지난해보다 각각 2.1%와 0.5% 증가했다. 그러나 소비에 비례해 증가해야 할 부가가치세(5월 누계ㆍ23조4,447억원)는 같은 기간 오히려 전년 대비 7.2%나 감소했다. 이는 올 들어 늘어난 민간소비 가운데 상당 부분이 세정당국의 감시망 바깥에서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신용카드 결제동향과 우리나라 최고 액면 화폐인 오만원 유통에서도 지하경제의 역습이 감지된다. 기재부 통계에 따르면 1월부터 6월까지 신용카드 국내 승인액 증가율은 3~5%에 머물고 있는데, 이는 불황에도 15% 증가세를 유지했던 지난해의 5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반면 한국은행이 오만원권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은행 창구에서는 늘 고액권이 부족한 상황이다.
서울 중구 을지로동 소재 증권사 지점의 직원은 올해 들어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이 2,000만원으로 낮아지고, 자녀명의 통장에 대한 증여세 과세 강화 방침이 전해진 전후 거액 현금인출 고객이 늘었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최근 3주 동안 우리 지점에서 1,000만원 이상을 출금한 고객이 6명인데, 모두 오만원권으로 인출했다. 그 중 한 명은 2억5,000만원을 찾아갔는데, 꾹꾹 눌러 담으면 오만원권이 3억원 정도 들어가는 위치추적기 부착 가방을 가지고 아래층에 있는 은행에 가서 돈을 담아 와 고객에게 전달했다. 은행에 오만원권이 부족해 준비하는 데만 20분이 넘게 걸렸다."
이렇게 찾아간 오만원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강남 부동산 부자로 소문난 한 코스닥 상장기업 사장은 "부유층들은 이미 지하경제 양성화 공약이 부각된 지난해 대선기간부터 금융자산을 오만원권 현금으로 인출하고 골드바(gold bar)를 구입해 집안 금고에 차곡차곡 보관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고 귀띔했다.
골드바를 판매 중인 서초구의 한 시중은행 직원도 "특히 지난 4월 국제 금 시세가 떨어졌을 무렵 골드바 구매 문의가 급증했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엔 본점에 신청하면 2,3일 후 물건이 들어왔는데 올 봄부터는 신청 두 달 후에야 구할 수 있으며, 6월의 경우 500만원 상당의 100g짜리 10개가 들어왔지만, 그날 전량이 팔렸다"며 "금값이 6월 말에 저점을 찍고 다시 상승하고 있는데도 '다음에 또 들어오면 알려달라'며 연락처를 남긴 고객들이 많다. 가격에 관계없이 대물림 용도로 꾸준히 구입하는 부자들도 늘고 있다"며 골드바의 인기를 전했다.
'꼬리표를 뗀' 오만원권은 부동산 매매 같은 거액거래시 세금 회피 목적으로도 사용된다. 강남의 부동산 중개업자는 "올해 5월 말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6억원대 아파트 매매계약 당시 매수자의 어머니가 1억원 씩 포장한 봉투 2개를 가지고 와 당황했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하나당 벽돌 6장 정도 크기였던 1억원짜리 돈뭉치 2개를 종이가방에 넣어와 "2억은 현금으로 내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 중개업자는 은행을 통한 계좌이체를 부탁했으나 "알아서 해달라"며 고집을 피워 할 수 없이 돈뭉치를 풀어봤더니 오랜 기간 보관한 듯 지폐가 눅눅하고 꾹꾹 눌려있어 제대로 세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했다.
미리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에 대비하지 못한 부유층들은 금융종합과세 한도 2,000만원 축소 소식이 들리던 지난해 말 즉시연금보험으로 몰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씨가 30억원을 한꺼번에 입금하고 매달1,200만원의 원리금을 지급받아온 것이 보도되면서 유명해진 바로 그 상품이다. 워낙 거액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올 들어 비과세 한도가 2억원으로 낮아졌을 정도다.
한편 고소득을 올리면서도 수입을 숨기고 세금을 회피하려는 일부 자영업자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현금 거래로 당국의 감시망을 피하기도 한다. 서울 중구 명동의 한 백화점 가전매장 직원은 "가끔 사업하는 분들이 현금을 들고 와 '아무 것도 필요 없다'며 영수증을 끊지 않고 최신형 TV 등 수천만원어치의 제품을 구입해간다. 공식적인 기록이 남는 영수증 발급이나 백화점카드 적립은 안 하면서 본인 확인 없이 받을 수 있는 상품권 행사나 사은품은 꼭 챙겨가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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