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입대한 육군 제11기계화보병사단 소속 정모(22) 일병은 요즘 저녁이 즐겁다. 일과가 끝나는 오후 5시 이후엔 취미인 독서를 하러 도서관에 가거나 농구장에서 동기들과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선임병 없이 동기끼리 내무반을 쓰는 덕분에 생긴 여유다.
대기업에 입사한 이모(28)씨는 업무 시작시간인 9시보다 10분 일찍 출근했다가 부장한테 불려가 혼쭐이 났다. "신입사원이니 1시간은 일찍 나와야 한다"는 게 부장의 말이었다. 조기출근은 업무 준비를 위해 필요하다 쳐도 더한 것은 퇴근시간이다. 맡은 일을 끝냈는지와 무관하게 무조건 부장이 자리를 떠야 사무실을 나설 수 있다. 할 일이 없어도 매일 눈치보기 야근이다.
군은 달라지고 있는데, 사회는 군대문화에 젖어 있다. 국방부는 지난 해부터 동기끼리 내무반 생활을 하는 '동기 생활관'을 도입해 점차 확대하고 있다. "동기 생활관 제도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한 공감대가 퍼지면서 도입 부대가 전체의 과반인 880개로 확대됐다"는 게 국방부의 자평이다. 눈치 볼 선임병이 없으니 훈련이나 보직업무가 끝나면, 이병이라도 도서관, 농구장, 사이버지식정보방 출입이 자유롭다.
전시 상황을 가정한 집단 훈련체제인 군대에서 상명하복의 엄격한 위계질서는 조직 유지의 핵심이다. 이런 근본 가치를 일부 희생하면서까지 군이 변화를 추구하는 이유는 그 부작용 때문이다. 점호, 교육ㆍ훈련, 식사, 작업, 취침 등 24시간 내내 병장부터 이병이 함께 지내다 보니 계급에 따라 후임병이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고 구타나 폭력까지 일어나는 폐해가 계속돼 왔다. 신세대 장병들의 군 적응을 위해서라도 군 문화 개선이 필수적이라는 요구가 많았다.
반면, 사회는 여전히 '제2의 군대'다. 단결과 협동심 고취를 내세워 병영체험 캠프에서 수련회를 하는 회사와 학교, '군기'를 잡는다며 후배를 얼차려 주는 대학, 극기의 정신을 기를 수 있다며 열악한 숙식을 당연시하고 성추행과 구타도 서슴지 않는 국토대장정….
출판사에 다니는 김모(30)씨는 말끝마다 "여자라 군대를 안 갔다 와서 잘 모르나 본데"라고 하는 부장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김씨는 "법정공휴일인 노동절에 워크숍이라며 체육대회를 잡아놓고 전 사원 참석을 강요했다"며 "사정이 있어 불참하겠다고 하니 군대를 예로 들며 개인 사정을 봐주기 시작하면 조직이 굴러갈 수 없다고 되레 다그치더라"고 푸념했다. 그렇게 노동절에 출근해 김씨가 한 일은 운동경기를 하는 남자 직원들을 응원하는 일이었다. 순전히 "사장님께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비수기에 강제 야근을 한 것도 여러 번이다. 김씨는 "상사는 늘 '윗사람 말에 토 달지 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 조직 생활은 통일이 중요하다. 군대 다녀온 사람들은 잘 알 거다'라고 강조한다"며 "이게 군대가 아니고 뭐냐"고 되물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군대문화가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에서도 통할 것이라고 믿는 환상 때문이다. 김엘리 이화여대 리더십개발원 특임교수(여성학)는 "회사는 명령에 복종해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군대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며 "엄격한 서열제도나 명령식 의사소통 구조, 불순종에 대한 처벌 등 군대문화를 기업에서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대다수 조직의 간부들이 군 생활을 경험한 남성들이라는 점도 사회의 군 논리를 견고하게 하는 요소다. 군대를 다녀온 성인 남성 510명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한 적이 있는 윤민재 연세대 연구교수(사회학)는 "군 복무자들은 사회에 나와 군대식 언어폭력이나 구타 등이 별 것 아니라거나 당연한 남자들의 세계라고 여기는 경향이 많다"며 "대한민국 남성 대다수가 군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영향이 회사, 조직, 사회 전반에 지속적으로 미치며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성차별주의, 위계주의 등의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군대문화는 인격을 말살하고 민주사회의 가치를 무시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심리치유센터인 '와락'을 운영하는 심리기획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이명수씨는 "흔히 '군대 다녀오면 사람 된다'는 말을 하지만 결국은 토 달지 않고 명령대로 순응하고 수용하는 수동적인 인간이 된다는 뜻 아니냐"고 꼬집었다. 김엘리 교수는 "고교생 사망 사고까지 일으킨 사설 해병대 캠프의 가장 큰 문제는 '물에 뛰어 들라'는 일방적인 명령에 따르는 방식의 훈련이 이른바 강인한 사회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잘못된 믿음"이라며 "군대에서 배운 비인간화 과정을 사회가 아무 문제의식 없이 내면화하고 있고 이것은 소통과 공존, 다양성과 창의성을 지향하는 시대의 가치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군대문화는 우리 사회에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한다. 겉으로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구성원 간 갈등과 사고를 유발하고 창의적 아이디어를 고사시키는 등 숨은 비효율성도 적지 않다. 윤민재 교수는 "군대에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문화풍토로 피해를 경험한 이들이 사회에 나와 다른 피해자를 낳는다"고 분석했다. 이명수씨는 "군대식으로 다스리면 잡음을 없애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효율적이라고 믿을지 모르지만 조직 내 갈등과 분쟁 등 대가가 크다"고 지적했다.
손효숙기자 shs@hk.co.kr 김관진기자 spirit@hk.co.kr
김지은기자 luna@hk.co.kr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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