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한 백화점 의류매장 점원 여모(21ㆍ여)씨는 하루 10시간씩 일한다. 여씨는 점심 1시간과 간식시간(티타임 포함)을 빼면 8시간 이상 서 있는다. 일한 지 석 달째라는 그는 다리에 통증이 오면 매장 안 창고에서 눈치껏 기대거나 화장실 간 김에 변기뚜껑을 내리고 잠깐 앉는다.
여씨가 일하는 백화점에 의자가 없진 않다. 다만 판매직원이 오래 서 있는 매장 대신 따로 떨어진 휴게실에 의자가 있다. 주로 고정 휴식시간에만 이용 가능하다. 여씨에겐 이마저도 놓칠 때가 잦다. 여씨는 "시즌세일 같은 행사 참여로 고객이 몰리면 휴식도 자진 반납한다"고 털어놨다. 부은 다리를 주무를 틈도 없는 셈이다. 게다가 행사는 30분~1시간 연장 근무하는 주말에 열린다.
2008년 9월부터 백화점, 대형마트 등에 장시간 서서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의자가 놓인 지 5년이 됐지만 '앉을 권리'는 제자리 걸음이다. 의자는 당시 서비스연맹 등이 벌인 '서서 일하는 여성에게 의자를'이란 일명 '의자 캠페인'이 확산되고, 이어 노동부가 실태조사에 나서며 속속 등장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백화점들은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작업 중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해당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갖추어 두어야 한다'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 80조(의자의 비치)에 따라 몇 군데 의자는 뒀지만 대다수 판매직원들은 '때때로 앉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11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백화점 지하 1층. 마트 계산대에는 의자가 비치돼 일부 계산원들이 손님이 뜸한 때 잠깐 앉기도 했지만 식품코너에선 의자를 거의 볼 수 없었다. 한 건강식품 매장은 한산했지만 4명의 판매직원이 흰 가운을 입고 2열로 반듯이 서 있었다. 한 속옷 행사장에도 20대 여직원 2명이 의자 없이 10시간을 서 있었다. 한 직원은 "판매대 밑에 재고를 꺼낼 때 앉으며 참는다"고 말했다.
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조차 두지 않은 곳도 줄어들 기색이 없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의자 비치를 하지 않은 백화점 대형마트 등에 대해 시정조치 내린 건수는 2010년 21건, 2011년 18건, 지난해 22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화점들은 되레 서비스 정신을 강조하며 근무태도 감시에는 엄하다. 판매직원 근무 감시를 위해 여론조사기관에 서비스 모니터링을 의뢰, 손님 행세하는 감시자인 '미스터리 쇼퍼'를 투입한 백화점까지 있다. 지난 6월 서울의 한 백화점 신발 매장은 서비스평가에서 'C' 를 받았다. '직원이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는 게 사유 중 하나다.
부산의 또 다른 백화점 신발매장 점원 윤모(25)씨는 '찰칵'소리에 예민하다. 얼마 전 3시간 남짓 서 있다 벽에 기댔는데 서비스 매니저에게 사진 찍힌 탓이다. 그는 "찍히면 자칫 교육까지 받게 돼 다른 매장과 카카오톡을 통해 걸터앉아 쉴 타이밍을 잡기도 한다"고 말했다. 액세서리점에서 8년 일한 손모(36)씨는 "매출 안 나오는 매장 직원들은 퇴출 명분이 필요한 백화점의 타깃"이라며 "고객 상담할 때 외엔 앉을 엄두도 못 낸다"고 전했다.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은 "백화점들이 의자만 두는 법적 항목만 행한 채 못 앉게 압박하지 말고 업무지침으로 배려해야 한다"며 "서서 일하는 노동자의 근무 여건에 대한 실태조사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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