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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계좌 개설' 고객 요구 거부 못해… 탈세·비자금 등 단골 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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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계좌 개설' 고객 요구 거부 못해… 탈세·비자금 등 단골 창구

입력
2013.08.1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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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은행의 지점장 B씨는 올 4월 평소 거래하던 중소기업 자금담당 임원으로부터 당혹스러운 요구를 받았다. 법인이나 본인이 아닌 직원 10여명의 개인명의 계좌를 개설해 달라는 것. B씨는 "금융실명제법에 따라 계좌를 개설할 본인들이 직접 은행 창구로 와야 한다"고 설명했으나, 그 임원은 "다른 은행에서는 알아서 통장을 만들어 주던데 왜 깐깐하게 구느냐"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결국 B씨는 은행원을 그 기업에 보내 일일이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뒤 계좌를 개설해 주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B씨는 "이 기업은 직원들의 월급을 우리 지점에 맡기고 있으며, 예금과 대출 규모도 상당한 우수고객이어서 요구를 외면하기가 힘들었다"며 "차명계좌를 운영하려는 것이란 심증은 가지만 그걸 확인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거래은행을 옮겨버리면 우리 지점의 실적만 떨어져 적극적으로 따져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12일로 시행 20년을 맞은 금융실명제의 가장 큰 허점은 차명계좌다. 금융실명제는 차명계좌를 개설하거나 이름을 빌려준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다. 때문에 차명계좌는 탈세, 비자금 조성, 편법 증여 및 상속 관련 사건 터질 때마다 단골로 등장한다.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탈세와 편법상속 등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있지만 차명계좌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금융실명제를 최전선에서 적용하고 있는 은행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제도적인 허점이 많은 데다가 금융사간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대부분의 금융회사들이 관행적으로 차명계좌 개설을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C은행 고위 관계자는 이재현 회장이 우리은행에 개설된 수백개의 차명계좌로 비자금을 관리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해 "우리은행만 CJ에게 차명계좌를 개설해 준 것이 아니라 사실상 대부분 은행들에 수많은 대기업의 차명계좌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대기업 사주일가를 비롯한 VIP 고객들이 자녀나 직원 등의 명의로 계좌 개설을 요구하면, 이를 거절할 은행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형식적인 실명 확인절차만 거치면 법에 저촉되지도 않는다. D은행 지점 관계자도 "부자 고객들은 금리 0.1% 차이에도 거래은행을 쉽게 바꿔버리는 상황에서 실적 관리를 하려면 차명계좌 개설 요구를 규정대로만 처리할 수는 없다"고 하소연했다.

차명계좌를 이용한 탈세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으로, 범죄의 경우는 범죄수익은닉규제법과 조세범처벌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법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범죄가 드러나지 않는 한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를 추적하기는 매우 힘들다. 부모가 돈을 대준다는데, 사업주가 명의를 빌려달라는데 이를 거절할 자녀나 직원은 거의 없다. 그래서 정확한 차명거래 및 차명재산의 규모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최근 민병두 민주당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이후 올해 상반기까지 차명계좌를 활용한 저축은행 비리로 금융감독원에 적발된 건수는 2,383건으로, 규모만도 6조7,546억원에 달한다. 특히 부실 대출 등으로 저축은행들이 대거 퇴출된 2012년에서 올해 상반기까지 차명계좌를 활용한 저축은행 비리만 3조7,533억원에 달해, 차명계좌 관련 비리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보여준다. 민 의원은 "저축은행 비리만 이 정도에 이른다는 것은 자산규모가 훨씬 큰 은행 보험 증권에는 최소 수십조원의 규모의 차명계좌가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계약자와 수익자를 다르게 지정할 수 있는데다 계약 후에도 수익자를 수시로 변경할 수 있고 수익자의 신원을 심사하지 않는 대다수 보험상품이나 돈의 실제 주인이 드러나지 않도록 차명으로 주식을 운용하는 증권계좌 역시 비자금 조성과 탈세 등의 수단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대부분 보험사와 증권사 관계자들도 이런 차명거래 가능성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보험 계약 시 계약자가 범죄를 저지를 것으로 예상하는 경우가 있겠느냐"며 "당장 실적이 눈 앞에 보이는데 계약을 안 해줄 모집인은 없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모 증권사 관계자 역시 "업계 전반의 경기가 최악인 상황에서 차명계좌라도 운용하면서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한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이런 상황에서 관련 규제만 강화한다고 해 차명거래가 없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금융계는 회의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부자들은 어떻게든 드러나지 않는 절세 방법을 찾을 것이며 금융회사는 어떻게든 실적을 유지하려고 할 것"이라며 "실적을 포기하고 법을 지킬 것이냐, 법을 피해 실적을 올릴 것이냐의 딜레마 속에서 금융회사의 줄타기는 계속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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