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무대 후면 벽에 걸린 크고 작은 40개의 TV모니터가 시선을 집중시킨다. 화면을 채우는 것은 선전ㆍ선동에 가까운 미국 미디어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영상물들이다. 예컨대 북한의 핵무기와 사담 후세인, 참혹한 전장에 집중하는 뉴스 화면들. 미국 내 문제를 은폐하고 대중의 관심을 바깥으로 돌리는 전쟁과 테러의 이미지다. 그리고 이내 관객은 "바보 같은 미국인은 되고 싶지 않아"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첫 삽입곡 '아메리칸 이디엇'(American Idiot)과 만난다. 조작된 미디어로 둘러싸인 미국 사회에 대한 자조와 분노를 표현한 곡이다.
9월 5~22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무대에 오를 브로드웨이 뮤지컬 '아메리칸 이디엇' 을 8일 도쿄 국제포럼 홀에서 미리 관람했다. 공연팀은 7일 시작해 18일까지 이어지는 도쿄 공연을 마치고 한국을 찾는다.
3명의 청년 조니(션 마이클 머레이)와 터니(토마스 해트릭), 윌(케이시 오페럴)은 텔레비전이 세상과의 유일한 접점인 교외의 단조롭고 무의미한 일상 속에 헛되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뮤지컬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9ㆍ11 테러 이후 미국 젊은이들이 직면한 불안한 현실과 정체성의 혼란을 그린다.
미국의 펑크록밴드 그린데이가 2004년 발표한 동명의 콘셉트 앨범을 뮤지컬로 옮겼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연출가로 한국에도 알려진 마이클 메이어는 가사의 내용이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는 음반의 서사구조를 충실히 따르되 캐릭터를 보강하고 밴드의 또 다른 앨범 '21세기 브레이크다운'(21st Century Breakdownㆍ2009)의 일부 수록곡을 보탰다. 밴드의 리드 싱어인 빌리 조 암스트롱도 극작에 참여했다. 2009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레퍼토리 극장에서 초연됐다.
9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 타임에 극중 인물들의 1년 10개월여의 궤적을 담아 낸 빠른 전개와 비디오 아트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무대ㆍ조명 디자인, 검증된 음악의 완성도가 공연의 특징이다. 출연진의 기량도 평균 이상이다. 대부분 최근까지 북미 투어 공연에 참여했던 배우들이다.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객석의 반응도 좋았다. 두 자녀의 제안으로 공연장을 함께 찾았다는 도야 가요코(62)씨는 "그린데이의 음악은 젊은 계층의 것으로만 여겨 왔는데 뮤지컬 형식에 녹여 내니 미국 젊은이들의 절절한 고민을 담은 가사가 실감나게 드러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개연성이 약한 한계를 지닌 이 작품이 스토리를 중시하는 한국 관객에게 어떤 반응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연출가는 "3명의 젊은이들이 관성적 삶에 맞서다 좌절하며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해 가는 이야기의 주제는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을 초월해 보편성을 띤다"고 설명하지만 미국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어서 한국 관객에게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기존 뮤지컬 마니아 외에 그린데이의 팬을 새로운 뮤지컬 관객으로 흡수할 수 있는 점은 고무적이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해외 프러덕션 내한 특성상 티켓 가격의 진입 장벽이 꽤 높은 편이다. 7월 8일부터 판매되고 있는 이 공연의 티켓 최고가는 15만원이며 10만원 미만 가격의 티켓은 3층 객석에만 적용된다. 1588-5212
도쿄=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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