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경복궁에서 물산공진회를 개최한 것은 1915년의 일이다. 식민 치하에서도 물산이 풍요로워졌음을 과시하는 한편 경복궁의 민족· 역사적 상징성을 퇴색시키려는 의도였다. 근정전 앞쪽으로 전각과 담장이 헐려나간 자리에는 다른 전시관과 함께 돼지우리까지 들어섰다. 가축의 품종 개량을 보여준다는 구실로 조선 정궁에 대한 무례를 저지른 것이었다.
물산공진회가 열린 이듬해 그 자리에서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 공사가 시작된 것은 미리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 500년을 이어 내려온 왕조의 중심부에 총독부를 세움으로써 식민 통치의 위엄을 내세우려는 뜻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도 중앙청과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바로 그 청사다.
총독부 청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이던 1995년 완전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철거 작업이 이뤄졌던 것이다. 일제에 의해 자리가 옮겨졌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환원된 광화문도 방향과 위치까지 제대로 잡아 다시 세워졌다. 이런 식으로 홍례문과 강녕전 건청궁 태원전은 물론 그 주변 전각들이 복원된 데 이어 나머지 부속 건물들을 되살리는 작업이 2030년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 복원 사업은 이미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총독부 청사를 해체할 당시 그 지반에 박혀 있는 나무말뚝을 뽑아내지 않고 넘어간 것이 바로 그것이다. 화강암으로 지어지는 청사의 하중을 버티기 위해 지하 4m 깊이에 9,300여개의 소나무 말뚝이 촘촘히 박혀져 있었으나 굴착 작업에 따른 비용과 시간상의 문제로 그냥 놓아두었던 것이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면서도 땅속에 대해서는 슬며시 넘어간 자체가 문제다. 말뚝들이 바늘처럼 박혀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애써 평가 절하하며 다시 흙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경복궁이 원래 모습을 찾는다한들 그 진정한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끼리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해서 끝날 문제도 아니다. 경복궁을 찾는 일본 관광객들이 서로 수근대는 표정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그 파급 효과는 충분히 우려스럽다. 더구나 일본에서 독도 영유권이나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망발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상황이다. 정치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참배가 이어지는가 하면 한일전 축구 경기장에 욱일승천기가 버젓이 휘날리기도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일본을 향해서만 외칠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 스스로 역사를 잊거나 훼손한 것은 없는지도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경복궁의 야간 개방 조치를 틈타 술판이 벌어지고 노점상들로 시장 바닥을 이루는 모습도 스스로 역사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다. 100년 전의 물산공진회 때도 밤중까지 전시회가 이어졌지만 그러한 추태가 벌어졌다는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경복궁 신무문 위에서 청와대를 향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문화재 당국이 땅바닥을 덮은 채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경복궁 나무말뚝의 사례는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구태여 감춰진 것까지 들춰낼 필요가 없다는 희미한 문제의식이 일본 정치인들로 하여금 과거사 도발을 일으키도록 용인한 측면이 없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역사를 되살린다는 거창한 의미를 떠나서도 땅바닥의 나무말뚝을 그대로 둔 것은 경복궁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렇게 처리하고도 쉬쉬하며 복원을 했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이미 그 위에 전각 복원공사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해결 방안이 쉽지 않은 것이 그런 때문이다.
달리 방법이 없다면 참회록이라도 남겨야 한다. 사소하다고 해서 역사의 한 조각을 놓쳐버린 냉엄한 반성이 없이는 후세들에게도 역사를 무서워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경복궁의 나무말뚝은 그 자체로 역사의 엄정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허영섭 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