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언론학자겸 저널리스트 헤르만 마인은 신문의 속성을 '빌트인 정신분열(built-in schizophrenia)'이라고 비유했다. 슈피겔지 정치 에디터와 연방 언론인협회장 등을 지낸 그는 저서 에서 공익과 이윤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사기업 신문의 원초적 숙명을 그렇게 규정했다.
독일 신문은 '사회국가' 원리를 좇아 서구에서도 가장 진보적 구조로 발전했다. 그러나 모두 사기업인 신문은 공익적 언론 상품으로서 여론· 독자 시장에서 경쟁하는 동시에 광고 매체로서 제한된 광고 시장을 다퉈야 하는 이중적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신문의 상식을 새삼 거론한 이유가 있다. 신문의 내부 갈등이 표출될 때마다 주변에서 훈수하는 이들은 신문이 오로지 공익을 위해 봉사하는 사회적 공기(公器)인양 추켜세우기 일쑤다. 이런 과장된 찬양, 공치사에 더러 어깨가 으쓱할지 모른다. 그러나 신문의 출발이나 본질, 특히 현실과 거리 먼 찬사는 갈등 해결을 돕기보다 오히려 방해하기 마련이다.
지나간 독재 시대, 신문 내부의 갈등은 대개 권력의 간섭에 맞선 기자들과 순응하려는 신문 경영주의 싸움이었다. 이에 비해 민주화 이후 경영주와 기자 집단 또는 노조의 갈등은 외부 간섭이나 신문의 이념· 노선을 둘러싼 것보다 먹고 사는 생존의 다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문의 생존 환경이 급속하게 악화하면서 그 다툼은 갈수록 각박하고 험악하다.
이런 근원을 애써 모른 체하고 마치 언론의 자유와 공익적 임무 등이 갈등의 출발점이고, 시비를 가리는 유일한 기준인양 떠드는 것은 실제 신문과 기자들의 생존에 별로 도움 되지 않는다. 어떤 동기와 명분에서든 열심히 훈수하는 이들은 스스로 기꺼울지 모르나, 싸움이 끝나고 나면 신문과 기자들만 폐허에 남기 십상이다. 그 폐허 위에서 빛바랜 과거의 영광과 자존심에 의지해 간신히 지탱하는 신문도 있다. 그러나 먹고 사는 형편이 어려울수록 흔히 좌우 극단의 외골수로 흘러 주류에서 멀리 벗어난다.
우리 신문의 생존 환경은 세계적으로도 유난히 황폐화하고 있다. 몇몇 보수 신문이 자본의 힘과 변칙적 광고 기사 등으로 버티고 있지만, 나머지는 대개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진보 신문은 양극화 구도에 기대어 겨우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중도· 중립을 표방한 신문은 더욱 절박한 생존 위기 속에 정체성을 지키기도 어렵다.
신문 제국 영국이 이미 그런 길을 걸었다. 이념과 판매부수에서 중간 지점에 있던 신문 타이틀이 오래전 잇따라 사라졌다. 공익재단을 발판으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지킨 진보 신문 더 가디언은 경영 압박으로 종이 신문 포기와 전면 온라인화를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도 최대 부수의 권위지인 진보 신문 쥐드도이체차이퉁이 지난해 4,700만 유로, 700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일본과 더불어 신문 구독률이 가장 높은 '독서 사회'가 그런 형편이다.
신문의 '내적 자유' 논쟁에서 앞선 독일은 일찍이 사민당 정부가 입법화를 시도했다가 몇몇 신문이 자율적 규정을 두는 데 그쳤다. 이 논쟁과 규정은 흔적만 남았다. 신문 산업 자체가 위기에 처한 탓이다. 소수 출판· 미디어그룹의 언론 독과점과 폐해 논란도 시들하다. 역시 생존 환경이 어려워진 때문이다.
신문의 실패는 경영의 잘못과 비리, 비전과 역량 부족 탓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근원인 신문 산업의 위기를 외면한 채 도덕과 윤리를 논하는 것은 헛된 공론(空論)일 수밖에 없다. 살아남은 자의 얄팍한 동정과 야비한 악의마저 깃든 훈수는 애초 쓸모없다. 그들 가운데 자본의 비리와 위선적 생존 방식에서 자유로운 신문은 없다.
이런 위선과 악의를 딛고 힘겨운 생존과 정체성을 그나마 지키는 길을 냉철하게 가늠해야 한다. 스러진 빛과 영광을 속절없이 되뇌는 이들부터 깊이 숙고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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