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거저 내리는 것이 아니여. 비마다 다 사연이 있능겨." 어릴 때 어머니가 들려주던 말이다. "유두날만 봐도 꼭 사흘 비가 내리잖여. 예전에 부녀자들의 바깥나들이가 금지되던 시절에 이 날만은 특별하게 나들이를 할 수 있었거등. 그런데 비가 내리면 나들이를 하지 못하게 된 부녀자들의 한이 서려 사흘간 비가 내리는 거여." 우리네 조상들은 어떤 비라도 그 안에는 이처럼 비가 내리는 사연이 있다고 믿었다.
"하늘에 사람을 제물로 드려 제사를 지내면 비가 내릴 것입니다." 중국 은나라 탕왕 시절 7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 비가 내린다는 말에 탕왕은 "내가 하늘에 빌고자 하는 비는 백성을 위한 것인데 백성을 죽여 빌 것이면 차라리 내 몸으로 대신 하겠노라"면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비를 빌었다. 그랬더니 하늘이 감동해 사방 천리에 큰 비가 내렸다고 한다. 중국역사에 전해오는 '탕왕우'(湯王雨) 이야기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죽어 비를 하늘에 간구하겠다는 '왕의 비' 이야기가 있다. 십 여 년 전에 장안의 화제를 모으면서 방영되었던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마지막 회를 보면 태종대왕이 가뭄으로 절망에 빠져있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죽어가면서 하늘에 비를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태종의 간구 때문이었을까? 그가 죽은 날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다고 '동국세시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 뒤 태종의 죽은 날인 음력 5월10일이 되면 매년 비가 내려 가뭄을 면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이날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 부르기 시작했다. '탕왕우'나 '태종우'는 국민의 아픔을 헤아리는 좋은 비의 명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엔 이와는 대비되는 왕의 이름으로 내리는 비가 두 개 더 있다.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는 나이 51세에 열아홉 꽃다운 나이의 인목대비를 정실 왕비로 맞았다. 56세에 유일한 적출 영창대군을 얻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선조는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 광해군을 폐하고 어린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죽는 바람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자신을 반대하던 서인 세력들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인목대비를 폐서인(廢庶人)하였으며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하였다. 이를 계축사화(癸丑士禍)라 한다. 강화도로 유배되었던 영창대군은 강화부사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는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 불을 때서 죽였다. 펄펄 끓는 방바닥에서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필사의 몸부림을 치다 죽은 당시 영창대군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강화도에는 영창대군이 죽은 음력 2월9일을 전후하여 꼭 비가 내린다고 전해 온다. 백성들은 이 비를 살창우(殺昌雨)라 부른다.
민심을 잃은 광해군도 결국 재위 15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쫓겨나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속에서 광해군이 죽은 날이 음력 7월1일이다. 올해는 다음 주 수요일(7일)이 광해우가 내린다는 날이다. 그런데 이 날만 되면 꼭 비가 내리므로 민요가 생겼다. '칠월 초하루 날이여/ 칠월 초하루 날이여/ 대왕 어붕 하신 날이여/ 가물당도 비 오람 서라' 제주도민들은 이 날 내리는 비를 광해우(光海雨)라 부른다. 제주도민들은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속에서 죽은 광해군의 한이 비를 내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어려움과 한을 풀어주지 못한 광해군의 악행에 하늘이 눈물을 흘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기후통계로 영창대군과 광해군이 죽은 날 비오는 빈도를 조사해 보았다. 영창대군이 죽은 음력 2월9일에 비가 내린 확률은 이 시기의 다른 날에 비해 약 23% 정도 높다. 하지만 광해군이 죽은 음력 7월1일은 이 시기의 다른 날보다 오히려 비 내린 확률이 적었다. 하늘도 비명에 죽은 어린 영창대군을 더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닐까?
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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