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사업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은 간명하면서도 함축적이다. "무리하게 추진된 부분은 과감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엊그제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발언한 요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애초 한반도 대운하를 염두에 두고 진행됐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에 대한 후속 조치를 단호하게 주문한 것으로 들린다.
한 달 전에도 비슷한 언급이 있었다. "과거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추징금 환수 문제를 미적지근하게 끌고 온 데 대한 비판이다. 원전 짝퉁 부품 비리로 인한 여름철 전력 비상이 초미의 과제로 부각되던 때여서 이 전 대통령의 '직무 유기'를 겨냥한 것으로 볼 정황은 충분했다.
4대강 사업 감사 결과가 신뢰성에 의심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3차례 감사 결과가 모두 어긋나는 모양새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은 이미 스스로 부실을 드러내 상당한 생채기가 났다. 굳이 환경단체들의 주장을 인용할 것도 없다. 곳곳에 졸속 공사로 인한 부실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시공업체들의 담합 사실까지 확인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4대강 사업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도 이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이 후한 점수를 받기는 어렵다. 균형을 잃은 고위직 인사에 측근 비리가 이어졌으며, 역점을 두었던 자원 외교도 예산만 낭비한 채 비리로 얼룩지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로서는 '마이너스 통장'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할 만하다. 나름대로 차별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원세훈 전 국정원장까지 개인 비리로 구속되면서 선긋기 작업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전임 정부의 유산을 정리하고 색깔을 지우는 작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익숙한 풍경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이든 후임자에 의해 온전히 계승된 정치적 유산을 손꼽기 어려운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정부 부처 개편으로 5년마다 정책이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 또한 그러하다. 이유가 어디에 있든 지난 정부가 남긴 유산이 무시되거나 부정되면서 이어진 것이 우리 정치 역사의 불행한 현주소다.
심지어 군부 정권의 마지막 후계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임 전두환 대통령을 백담사로 귀양 보내는 방법으로 선긋기를 시도했다. 3당 합당으로 뒤를 이은 김영삼 대통령은 두 사람을 함께 법정에 세워 자신의 정당성 내지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전임 정부의 부채를 떠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 본인도 외환 위기라는 큰 빚을 다음 정부에 떠넘겼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적지 않은 채무를 남겼다. 금강산 사업이나 개성공단이 지금에 와서 다시 원점에서 논란이 이어지는 것은 과거 햇볕정책에서 파생된 유산이다. 북한 지도부로부터 안전장치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탓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모호한 서해 북방한계선(NLL) 발언으로 여야 갈등과 정치적 혼란의 꼬투리를 남겨 놓았다. 대선 득표를 노린 행정수도 구상도 지금에 이르러 정부 업무의 심각한 비효율을 초래하고 있다.
박 대통령도 이러한 처지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냉혹한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지금은 전임 대통령들에게 "무엇을 했느냐"고 묻고 있지만 5년 뒤에는 자신도 그런 추궁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다. 대통령의 책무를 미루거나 회피하는 직무 유기뿐만 아니라 과잉 의욕으로 인한 실책도 뒷날 가혹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규제의 '손톱 밑 가시'를 뽑는 경우에도 부작용과 후유증을 감안해야 한다. 이미 페달을 밟기 시작한 복지 정책과 경제 민주화, 지방 공약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점검이 요구된다. 국민 연금이나 밀양 송전탑 문제도 허투루 넘길 사안이 아니다. 정부 재정이 점차 한계에 이르고 있는 점도 유의 사항이다. 다음 정부에 '마이너스 통장'을 떠넘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허영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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