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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7월 16일]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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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태 칼럼/7월 16일]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입력
2013.07.1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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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태(鬼胎)' 망언의 당사자가 인용했다는 책에 관심이 갔다. 재일 학자들이 쓴 다. 일본어 원저(原著) 제목은 이다. 그 첫 장이 '제국의 귀태들'이다.

저자는 개인 사이트에서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룬 박정희와 A급 전범에서 총리에 오른 기시 노부스케 두 사람을 중심으로 제국의 실태를 살펴보고 그들의 후손이 권력을 장악한 현실을 통해 동북아의 현재와 장래를 고찰한다"는 요지로 책을 소개하고 있다. 인터넷 서평에서 읽은 책 머리말은 대충 이렇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일본 육사를 거쳐 만주국군 소위가 된 박정희에게 만주 체험은 분명 운명적 의미가 있다. 만주 인맥 중심의 친일파가 독재자의 권력을 공고히 한 데 그치지 않는다. 개발 독재와 한국적 민주주의에는 만주 제국의 유산이 고동치고 있다. 이 유산을 낳은 주인공은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의 중심인 기시 노부스케였다."

굳이 책을 사지 않은 것은 머리말과 목차만 보아도 정통 역사학적 연구와 거리가 먼 듯해서다. 잘 알려진 박정희의 '만주 체험'에 얽어 개발 독재를 제국의 유산으로 규정한 것에서 정밀한 학문적 논증을 기대할 수 없는 '비사(秘史)'류로 짐작했다. 특히 두 사람과 후손을 통해 동북아의 장래까지 살핀다는 말이 어설프다.

아무튼 기시 노부스케(1896~1987)는 만주국을 발판으로 전후 일본 보수 세력의 중심이 된 인물이다. 또 정경 유착 금권 정치의 대부로 정· 재계를 주물러 '쇼와(昭和)의 요괴'로 불렸다. 만주국과의 인연은 도쿄제국대학을 나와 통산성 관료로 일하다 1935년 만주국 총무청 차장으로 산업개발 정책을 지휘한 것이다. 이때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면서 정· 재계 영향력을 쌓아 1939년 귀국했을 때 이미 거물 원로로 행세했다.

그는 1941년 도조 내각의 통산상으로 전쟁을 총력 지원하면서 정· 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키웠다. 종전 뒤 전범 혐의로 3년 간 구금됐으나 기소되지 않은 배경도 미국이 그를 점령 통치에 요긴하다고 본 것이다. 이후 좌파까지 아우르는 정치력과 정략으로 자민당 40년 집권 체제를 열었고 1960년까지 두 차례 총리를 지냈다. 그 뒤에도 줄곧 정· 재계 실력자였다. 특히 동남아· 한국과의 국교 수립과 식민 지배 배상에 앞장섰다. 배상 자금이 일본 제품 수입 등을 통해 일본 재계에 되돌아온다는 계산이었다고 한다.

이런 인물과 박정희가 처음 대면한 것은 1961년이다.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지사들과 같은 사명감으로 나라를 빈곤에서 탈출시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말해 인상 깊었다고 기시는 회고록에 썼다. 그가 한일 협정 체결을 돕고 한일협력위원회 회장을 맡은 인연으로 박정희와 차관 리베이트 등 검은 커넥션으로 얽혔다는 주장은 새로울 게 없다.

무엇보다 "둘의 인연은 일제의 기형아 만주국에서 시작됐다"는 논리는 비약이 심하다. 박 전 대통령은 1937년 대구사범을 나와 교사로 근무하다 만주로 가 1942년 군관학교를 졸업했으니 만주국 학습과 견문을 했을 법하다. 그러나 집권 후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만주국과 연결하는 것은 그를 폄하하는 이들이 '자유당 정부의 구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도 어긋난다. 또 3차례 경제개발 계획을 입안한 김학렬과 정책 실행을 이끈 남덕우는 미국에서 공부했다.

개발 독재는 역사의 에피소드인 만주국이 아니라도 20세기 동서 어디든 사례가 많다. 흔한 실패와 드문 성공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나 새마을 운동 등의 대중 동원도 마찬가지다. 이를 외면한 채 애써 만주와 다카키 마사오를 상기시키는 것은 참된 역사 탐구일 수 없다. 천박하고 왜곡된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에 기댄 사악한 저주가 퇴행적 정치를 조장하는 현실이 딱하다.

강병태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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