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시절, 사초(史草)가 화근이 되어 일어난 당쟁 사건이 무오사화(戊午士禍)다. 선왕인 성종 시대의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헐뜯은 것이라는 험담이 연산군의 귀에 들어갔고, 결국 그것이 빌미가 되어 적잖은 유신들이 죽임을 당했다. 글을 썼던 김종직은 부관참시되었다.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의 알력이 문제였다. 훈구파의 일원이던 이극돈이 성종실록 편찬을 책임진 입장에서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속해 있던 사림파를 제거할 수 있는 꼬투리를 찾아낸 것이었다. 세조에 대한 내심의 불충만으로도 숙청의 명분으로 충분했다.
왕조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초를 누설하거나 훼손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엄벌로 다스리도록 되어 있었건만, 당파 싸움 앞에서는 이처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실록이 완성되고 사고에 보관되면 열람이 극히 제한되었던 것도 소모적인 마찰과 논쟁을 줄이려는 뜻이었다.
그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비슷한 사태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관련 기록물이 조만간 여야 의원들 앞에 펼쳐지게 된다. 대통령 지정 기록물이 15년 이내의 기간 동안 보호받게 되어 있는데도 국회 재적의원 3분의2 이상 찬성이라는 비상한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억지로 문서 창고의 빗장을 벗기려는 시도다.
지난날 왕조실록의 공개를 제한했던 것처럼 대통령기록물의 열람을 제한하고 있는 기본 취지도 어느새 무색해지고 말았다. 이미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국정원이 제출한 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본을 열람함으로써 판도라 상자의 뚜껑 한 귀퉁이가 열린 상태다. 그 목록의 존재조차 비밀인 지정 기록물이 정쟁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대해 어떻게 언급했는지, 그 진상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라지만 그 배경에 서로의 다른 셈법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익보다는 여야의 당리당략이 앞세워져 있는 것이다. '엉터리 국회'라는 자성의 반성문이 나오는 이유다.
설사 진상이 확인된다 하더라도 싸움이 그것으로 그칠는지도 의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각자의 입장에 맞추어 부분적으로나마 내용이 공개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국론이 더욱 분열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념 성향에 따른 여야 지지자들이 NLL을 놓고 역사의 단죄를 부르짖는 공방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기록물의 열람 방침이 결정된 이상 봉합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어 버렸다. 벌써부터 국회의원 면책특권이 거론되는 것도 앞으로 스스로에게 닥칠지 모르는 역풍을 미리 차단하자는 속셈일 터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여기저기 나돌아 다닌다는 정황도 국정의 난맥상을 말해준다. '제3의 발췌본'이 존재한다는 얘기도 그럴 듯하게 들린다.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국정원 직원에 의해 작성된 회의록이라고 해서 대통령기록물이 아닌 일반 공공기록물이라는 논란은 또 어떠한가. 역시 그 자체로 난센스일 뿐이다.
그런 차원을 떠나서도 이제 국가기록원이라는 은둔의 사고(史庫)에도 정쟁의 손때가 타기 시작했다는 것은 심각한 현실이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보관중인 1,950여만 건에 이르는 대통령기록물들이 다시 열람· 공개의 운명에 처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국회의 표결 처리로 언제라도 불러낼 수 있다는 집단적 인식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어느 대통령도 자신의 임기 중 기록을 남기려 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기록을 남김으로써 도리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익에 지장을 초래한다면 기록물을 남긴다는 발상이 흔쾌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정 운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도 대통령기록물은 존중돼야 한다. 지금 여야는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그러한 원칙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허영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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