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다녀왔다. 1년 만에 다시 하는 망막검사였는데, 간호사는 눈을 차례로 하나씩 가리고 숫자를 읽는 시력검사부터 받게 했다. 검사 후 ‘미리 슬쩍 봐둘 걸’ 하고 생각한 것은 시력이 더 나빠졌다고 했기 때문이다. 원래 짝눈이었는데 두 눈의 시력이 똑같은 걸로 나와 그런 생각이 더 났던 것 같다.
이어 간호사는 “산동제를 넣어야겠다.”며 두 눈에 안약을 넣어주었다. 처음 하는 검사가 아닌데도 산동제라는 말은 그날 처음 들은 것 같았다. 산동제? 산동제가 뭐지? 간호사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그녀는 “아, 그거 안약이에요.”하고 말았다. 흥, 그걸 대답이라고 해? 안약인 줄 누가 모르나? 그러면 눈에 넣는 게 안약이지 치약이겠어, 고약이겠어?
그렇게 안약을 넣고 의자에 앉아 망막검사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진료 진행상황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런 말이 있었다. ‘산동제 점적 후 30분 경과하면 동공이 확대되고 5~6시간 동안 눈이 뿌옇게 보여 운전을 할 수 없습니다.’ 그걸 보자마자 ‘말도 참 드럽게 어렵게 써놓았네.’ 하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니까 산동제는 동공을 확대하는 약, 즉 散瞳劑였던 것이다. 점적이라 하면 점 점(點), 방울 적(滴), 그러니까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일, 또는 그 방울이라는 뜻이다. ‘동공을 확대하는 약을 넣은 후’라는 말을 ‘산동제 점적 후’라고 유식하게 써 놓았던 것이다.
디지털 진료 상황판에는 점안이라고 돼 있었다. 물론 한글인데 보나마나 點眼이겠지. 눈에 안약을 떨어뜨려 넣는 것이다. 점안에는 다른 뜻이 하나 있다. ‘사람이나 짐승의 그림을 그린 뒤 맨 나중에 눈동자를 그려 넣는 일. 특히 불상(佛像)을 만들거나 그린 뒤 처음으로 불공을 드리는 의식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바로 이 경우에 쓰는 말이다.
나중에 일부러 사전을 찾아보니 산동제 외에 축동제라는 안약도 있었다. 동공을 축소시키는 것이니까 한자로 쓰면 縮瞳劑다. 동공을 왜 작게 만드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좀 쉬운 말로 쓸 수 없나, 말을 바꾸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계속했다.
진료를 마치자 안내를 맡은 간호사는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최대한 천사처럼 상냥하게 말끝을 올리며 이러구 저러구 하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좀 편안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면 어디 덧이라도 나는지. 나보고 저어기 가서 수납을 하라고 해서 “수납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병원이 하는 거죠. 나는 돈을 내는 거고.” 그랬는데, 그 간호사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역시 그저 천사처럼 상냥하고 친절하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병원을 나서니 그놈의 산동제 때문에 눈이 계속 침침해 햇빛에 눈이 부시고 걷기가 불편해 짜증스러웠다. 아 참, 진료 안내문에는 세극등검사라는 희한한 말도 있었다. 일자로 비추는 빛을 사용해서 각막과 수정체의 상태(condition)를 조사하는 검사라고 한다. 세극등을 한자로는 細隙燈이라고 쓴다. 그런데 일자는 또 뭐야? 무슨 기구 같긴 한데. 다시 산동제를 넣어 동공을 최대한 키운 뒤에 자료를 찾아봐야 알 수 있게 될랑가 모르겠다.
임철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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