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70)는 6· 25 전쟁에 관한 수정주의 역사관을 대표하는 진보 학자로 꼽힌다. 미 시카고 대 석좌교수인 그는 1981년과 1990년 발간한 1· 2권에서 6· 25가 미국의 '남침 유인(誘引)'에 따라 일어났다는 수정주의 사관을 피력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를 통해 6· 25 연구와 인식에 좋든 나쁘든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력은 1980년대 우리 사회에 진보주의가 본격 대두한 것과 맞물렸다. 6· 25가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서 비롯됐다는 반공주의 시각을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나름대로 깊이 있는 미국 학자의 연구는 학문적으로 기댈 값진 자원이었다. 커밍스는 으로 미 역사학회의 존 페어뱅크상 등을 받았다. 그는 흔히 '친북'으로 매도되지만, 여전히 6· 25 연구에 자주 인용된다.
6· 25 전쟁 63주년을 맞아 커밍스가 언론에 등장한 것은 언뜻 예사롭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제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은 남침이며, 나는 남침 유도설을 말한 적이 없다"고 밝힌 것은 흥미롭다. 그는 "나는 수정주의자도 아니며, 북침 주장설은 전두환 정권이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커밍스는 "남한을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국무장관의 모호한 전략 때문에 김일성이 어리석게 전쟁을 일으켰다"고 전쟁의 직접적 발단을 규정했다. 또 "애치슨이 전쟁을 유도하는 음모를 꾸민 것은 아니다"고 남침 유도설도 부정했다. 서울신문은 1990년대 옛 소련 기밀문서 공개로 북한의 '선제적 남침'을 부정할 수 없게 되면서 남침 유도설도 위축됐고, 커밍스도 결국 이를 공식 부인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 인터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다만 커밍스의 과거 주장과 관련해 모호한 부분이 있어 미 학계의 객관적 분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미 플로리다 대 캐스린 위더스비 교수는 1993년 논문에서 커밍스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했다. "커밍스는 6월25일 군사행동을 시작한 쪽이 어딘지 단정하지 않았다. 한국의 도발적 공격에 북한이 대응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또 소련의 영향력이 약소해 북한이 독자적으로 행동했을 수 있으며,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소련이 침략을 승인했다는 주장은 넌센스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커밍스는 전쟁의 직접 발단에 대해 독자적 견해를 내놓지 않았다. 다만 등에서 6· 25 전쟁 이전 남북이 옹진반도 등지에서 국지 전투를 되풀이한 사실을 강조했다. 이런 모호한 입장은 소련 기밀문서가 공개되기 전에 주로 미국과 한국 자료에 의존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북한과 소련의 실제 움직임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련 붕괴 뒤 공개된 기밀문서는 스탈린이 남침 계획을 승인한 경위와 준비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1950년 5월초 '선제공격작전계획'을 작성, 인민군총참모부와 함께 6월25일을 D데이로 잡은 사실까지 명확히 드러났다. 결국 커밍스의 학자로서의 과오는 부족한 근거를 토대로 진보적 견해를 피력, 의도가 어쨌든 북한과 소련 쪽에 기운 것이다.
물론 커밍스의 학문적 기여는 그 것대로 평가할 가치가 있다. 그는 서문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은 주로 1945년에서 1950년 사이 사건에서 찾아야 하며, 그 다음으로 식민통치 기간과 2차 대전 뒤 외부세력이 한국에 남긴 자취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썼다. 다른 책에서는 "김일성이 일으킨 한국전쟁은 1950년 6월25일 이전에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처럼 전쟁의 기원을 폭 넓게 탐구하고, 모든 당사자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은 교훈으로 삼을 만하다. 한반도와 우리 사회의 평화에 도움 될 것이다.
강병태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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