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일인극은 끝났습니다/(중략)이제 곧 사막의 별로 여행을 떠나면/ 저는 당신의 관객입니다.'('나의 관객들에게')
시인 정호승(64)이 등단 40주년을 맞아 펴낸 열한 번 째 시집 '여행'(창비 발행)은 생의 마지막 작별을 준비하는 일종의 '이별연습'이자 지난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이다. 평범한 말과 글을 빌어 비범한 시의 세계를 구축해온 그는 이번 시집에서 최근 점점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작별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되묻는다. 아흔 넷의 나이로 노환을 앓고 있는 아버지도 최근 세상을 등 진 친구와도 손 흔들며 이별 했듯이 자기 자신과도 머지 않아 결별해야 함을 알지만 그것은 오로지 슬픔만이 지배하는 세계만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그는 여행에 비유한다. 그리고 죽음은 그 긴 여정의 종장에 다름 아니다."우리가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데, 저도 상당히 먼 여행을 해온 거죠. 이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어요. 주변에서 하나 둘 맞고 있는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깊게 인식하는 나이에 이르렀지요. 죽음의 징검다리를 생각하지 않고는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갈 수 없고…. 죽음을 공부한다는 마음, 돌 하나씩 놓는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여행이 어떤 의미에서든 반드시 '회귀'(回歸)를 담보하듯이 우리의 여정도 결국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며 끝난다는 시인의 통찰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이다. 아울러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니라 영생으로 이끌 게 하는 힘은 바로 '사랑'이라고 시인은 주장한다."우리가 돌아갈 곳은 어디 일까요? 사랑이 있는 인간의 마음이 아닐까요? 어머니가 나를 낳은 자리에 사랑이 있고, 떠나온 그곳으로 돌아갈 때는 나도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죽은 자들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1972년 동시로 등단해 교사, 잡지사 기자를 거쳐 소설가 지망생에서 다시 시인의 길을 걷기까지 40년 시업을 통해 그는 '사랑을 통한 생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끊임없이 변주해 왔다. 그런 그에게 지난 날은 별을 쫓아 묵묵히 걸어온 날들이다.'지금까지 내가 걸어간 길은/ 별의 길을 따라 걸어간 길뿐이다/ 별의 골목길에 부는 바람에 모자를 날리고/ 그 모자를 주우려고 달려가다가/ 어둠에 걸려 몇 번 넘어졌을 뿐이다'
어둠이야 말로 별을 더욱 빛나게 하는 존재임을 아는 시인은 자신의 과오도 솔직하게 돌아볼 줄 아는 나이가 됐다. '누구든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할 때 그만 돌을 들고 말았고'(시 '속죄') '물 위를 걸은 예수의 흉내를 내다가 익사한 적이 있지만'(시 '아침에 쓴 편지') 그런 그가 꿈꾸는 여생은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죽음의 자존심은 노모처럼 성실히 섬기며'(시 '자존심에 대한 후회') 사는 것이다.
"1970년대 시인으로서 평범한 언어로 삶의 구체성을 노래하고 싶었다"는 고백처럼 평생 난해하고 생경한 말 대신 살아있는 언어로 평범한 이들의 사랑과 슬픔을 노래해온 시인의 우주는 그렇게 익어가는 중이다. 시인은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등단했고 이듬해에 대한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첨성대'가 당선되기도 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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