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지중해 오두막 별장크루즈 여행 다녀온 후 작은 선실의 실용성에 착안아늑한 원룸형태의 집 지어부모님 노후 위한 레만호의 집알프스 산자락 보이는 호숫가… 작지만 11m 긴 창 있는 집 완성당시 생경하고 파격적인 모습, 시의회에서 "모방금지" 하기도미래의 건축을 생각하다고층 구성 땐 도로와 녹지 확보… '아파트의 아버지'로 평가그러나 정작 본인의 삶은 자연과 더불어 '작은 집'과 함께
'집은 (사람이)살기 위한 기계이다.'
스위스의 10프랑 지폐에도 얼굴이 새겨진 근대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1887~1965)는 자신의 건축론을 담은 베스트셀러 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살기 위한 기계라는 것은, 집이 권력ㆍ재력을 과시하거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주창한 근대 건축 5원칙을 충실히 담은 '빌라 사보아',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 발휘할 수 있는 조형미를 한껏 살려낸 만년의 대표작 '롱샹 예배당'은 현대건축의 명작으로 꼽힌다. 그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고층 아파트의 원형을 설계한 것도 과밀한 도시에서 어떻게 하면 시민들이 편안하고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의 산물이었다.
르코르뷔지에가 자신과 가족을 위해 만든 집 두 채 가 있다. 스위스의 시계 수리공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만든 레만 호숫가 집은 20여평이었고, 자신의 별장으로 지은 집은 불과 4평 남짓하다. 이 건축의 거장은 왜 작은 집을 지었을까. 르코르뷔지에의 작은 집들을 다녀온 김홍기 동양미래대 교수에게 들어본다.
프랑스 남부 카프마르탱 해안은 코코 샤넬과 그레타 가르보가 자주 찾던 곳이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가 여생을 보낸 곳이다. 현대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 역시 풍광이 아름다운 이곳을 즐겨 찾았다. 1951년 12월 30일 르코르뷔지에는 이 해안 작은 스낵바 구석 테이블에 앉아 별장 계획안 스케치를 완성해 사랑하는 아내 이본에게 보여준다.
카프마르탱 해안의 별장 카바농
그로부터 1년 후, 지중해가 내다 보이는 이 해안 기슭에 통나무로 마감한 작은 별장이 들어섰다. 파리에 사무실을 둔 르코르뷔지에는 매년 여름을 여기서 보내면서 정신적 여유와 사색을 즐기곤 했다. 그러나 1965년 8월 27일 오전 수영복 차림으로 바다로 난 오솔길을 내려간 거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해수욕을 즐기던 관광객이 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사인은 심장 마비였다.
모나코와 망통 사이 로크브?p 마을의 카프마르탱 해안에 위치한 별장을 이곳 사람들은 '카바농'이라고 부른다. '캐빈'(오두막)이라는 뜻이다. 로크브?p 역에서 별장에 이르는 길에는 지금 '르코르뷔지에의 오솔길'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해안을 따라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숲 사이로 석면 슬레이트 지붕이 내려다 보이고 곧이어 굳게 닫힌 출입문을 만나게 된다. 내부 관람은 하루 한 차례 그룹 투어로만 가능하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비탈길을 내려가면 한 변이 3.66m인 통나무집과 마주친다. 4평(16㎡) 크기의 원룸 내부에는 르코르뷔지에가 직접 디자인한 두 개의 침대와 붙박이 옷장, 선반,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화장실은 최소 크기이고 천장 높이도 2.26m에 불과하다. 손을 뻗으면 천장이 닿을 듯하고 누우면 발이 닿을 듯한 작은 공간이지만, 서재이자 침실이자 거실의 역할을 너끈히 해낸다.
이 건축의 거장은 왜 이렇게 작고 옹색한 공간을 설계했을까. 고맙게도 그는 그 이유를 기록으로 남겼다. 15일간 크루즈 여행을 한 뒤의 감회다. "가로 세로 3m 크기의 캐빈(승객용 선실) 속에서 여러 날 지내면서 작지만 매우 실용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곳엔 1㎝의 허튼 공간도 없었지요. 언젠가는 이 아이디어를 이용해 최소한의 집을 꼭 짓고 싶었습니다."
카프마르탱의 별장이 바로 그 '최소한의 집'이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한 이곳에서 르코르뷔지에는 웃통을 벗고 때로는 나체로 휴식을 즐기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정방형 작은 창문 너머로 짙푸른 해안을 바라보며 절대 자유를 누렸고 창작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했다. 르코르뷔지에는 훗날 별장 근처에 작은 작업실 하나를 더 지었다. 작지만 이곳은 르코르뷔지에의 삶과 정신이 깃든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다.
레만호의 어머니를 위한 집
르코르뷔지에는 자신의 건축론을 펼친 책을 열 권 넘게 쓴 저술가다. 그에게는 미래를 예측하는 눈이 있었고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었다. 사회를 개혁하는 일은 정치가나 사상가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건축을 통해 사회가 개혁되길 원했다. 다가오는 미래에 건축은 어떻게 발전해가야 하는가? 주택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들을 논리적으로 서술한 저서를 30대 중반부터 내놓은 것이다.
그 중 1954년에 탈고한 이라는 책이 있다. 부모님의 노후를 위해 지은 집 이야기를 쓴 책이다. 이 주택의 건립 과정은 여느 건물과 사뭇 다르다. 1920년대 초반부터 르코르뷔지에는 주머니 속에 한 장의 주택 도면을 넣고 다녔다. 좋은 부지를 만나면 도면대로 실현시킬 요량이었다. 그가 찾는 대지는 남향이어야 하고 집 앞에 호수가 펼쳐져 있고 멀리 알프스 산자락이 보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위스 레만호를 지나다 그는 호수에 면한 폭이 좁고 긴 땅을 발견했다. 갖고 있던 평면과 비교해 보니 장갑에 손을 집어 넣은 것처럼 딱 맞았다.
1924년 콘크리트 슬래브로 된 육면체의 집이 완공되자 지방자치단체 시의회 의원들이 모여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건물을 '자연을 거스른 범죄 행위'로 몰아붙였다. 이 집을 모방하는 것을 금지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너무 생경하고 파격적인 건축이었다.
르코르뷔지에가 활동했던 1920년대 유럽은 건축에서 기능을 중시하던 시기다. 집을 지을 때 공간 구성의 합목적성과 치수 계획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1929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르코르뷔지에는 이 20평 남짓한 '작은 집'의 치수 계획을 이렇게 설명했다. "입구 3㎡, 화장실 1㎡, 거실 12㎡, 침실 9㎡, 부엌 4㎡…. 합계 57㎡입니다. 주택의 너비는 4m, 길이는 16m로 미리 정해 놓았습니다." 르코르뷔지에가 각 실의 면적과 합계 면적을 강조한 것은 이 주택의 테마가 '최소한의 주택'이었음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최소한의 경비로 효율적인 주택을 짓겠다는 의사 표시다.
집이 완성되자 르코르뷔지에는 기쁨에 차 올랐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안타깝게도 그 집으로 이사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모친 혼자 36년간 이곳에서 살았다. 그래서 이 집을 사람들은 '어머니의 집'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레만호 근처로 이사 오기 전 르코르뷔지에의 부모는 쥐라산맥으로 둘러싸인 스위스 산악지대 라쇼드퐁에서 줄곧 생활했다. 겨울이 길고 전나무 숲의 그림자가 짙은 라쇼드퐁을 떠나 전망이 확 트인 호수가로 부모의 삶 터를 옮기려고 했을 때 르코르뷔지에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미쳤다는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다. 습기 때문에 류머티즘에 걸릴 것이며, 호수에서 반사되는 빛에 눈이 부셔 고생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는 이런 문제를 건축적으로 거뜬히 풀어냈다. 레만호에 면한 남측에 11m의 긴 창을 뚫어 모든 방들이 햇빛을 맞도록 했다. 해는 온종일 집 앞을 순회했고 장대한 호수와 그 앞에 펼쳐진 알프스의 원경이 그림처럼 실내로 파고들었다. 그는 실제보다 더 넓게 느껴지도록 공간 배치의 오묘함을 추구했다. 르코르뷔지에의 어머니는 아들이 설계한 집에서 백수를 누렸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뒤인 1962년 이 집은 주정부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됐다.
아파트 창안자의 선택은 작은집
르코르뷔지에는 작은 집을 추구한 건축가는 아니다. 미래에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건축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골몰한 끝에 '인구 300만을 위한 도시 계획'을 발표하고, 고층 아파트로 구성된 미래 도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등 거대 담론을 다룬 책도 썼다. 주택이 고층으로 구성되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와 녹지가 확보되고 태양빛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런 논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프랑스 항구 도시 마르세유에 337세대로 구성된 현대적 개념의 집합주택 '위니테 다비타시옹'이 추진되면서 힘을 얻었다. 1952년 완공된 이 주택은 요즘 고층 아파트의 원형이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는 고층 아파트가 늘어가는 현대 도시의 창안자라는 평가까지 얻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찬사가 아니라 대규모 택지 개발의 폐해 등 현대 도시 문제의 원인 제공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르코르뷔지에가 사랑하는 부모를 위해 지은 것이나, 만년에 자신의 몸을 의탁해 생을 마감한 곳은 모두 작은 집이었다. 세대의 적정 규모부터 가구 치수에 이르기까지 공간의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해 심혈을 쏟은 이 거장에게는 해변과 호수 같은 자연과 더불어 있는 작은 집 한 채로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
김홍기 한국실내디자인학회장 동양미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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