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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은밀한 공간으로 독립한 '작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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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은밀한 공간으로 독립한 '작은 세상'

입력
2013.06.1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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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면으로 이뤄진 일상의 공간, 방을 인간의 존재 무대로서 고찰하고 있는 책이다. 방을 삶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독자적인 단위로 해석해 인간을 들여다본다. 개개의 소재에 대한 접근은 대단히 미시적인데, 그것을 책으로 꿰어 놓으니 호흡이 무척 긴 통시적 인문서가 됐다. 마치 은밀하고 세밀한 사연들이 모여서 된 대하소설 같다.

지은이 미셸 페로는 여성학 전공자다. 또 계급과 노동 문제에 천착해온 사회사가다. 조르주 상드, 시몬 드 보부아르, 프란츠 카프카 등등의 작품에서 눈치채기 쉽지 않은 작가들의 까탈스러운 생활 속 취향을 발라내는 준문학가이기도 하다. 이 책에 담긴 내용도 그래서 쉽게 종이 판별되지 않는다. 서양사(이영림)와 프랑스 문학(이은주)을 전공한 두 명의 역자가 필요했던 이유다.

방이란 어떤 공간일까. 지은이가 생각하는 방의 첫째 원칙은 격리다. 당연한 소리 같은데, 이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역사가 생각처럼 길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까지는 왕이나 귀족의 궁전에도 독자적인 공간이 없었다. 유럽의 고성에 가 보면 하나의 방을 통과해 바로 다른 방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방을 다른 방으로부터 격리시켜 주는 복도라는 건축적 구조가 영국에서 탄생한 것은 17세기 들어서의 일. 농민들은 20세기까지 한 공간에서 공동 생활을 했고, 도시의 노동 계급도 역시 하나의 공간을 일과 거주의 다용도 공간으로 썼다.

침실이 사적인 공간으로 독립한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중세인들은 커다란 침대에서 5~6명이 같이 잤다. 혼자 자는 침대로 잠자리의 개인화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이탈리아에서다. 귀족이나 부르주아에 어울릴 법했던 이런 침대가 17세기 파리에서는 민중계급까지 퍼졌다. 19세기에 노동자들은 공동 침실의 혼잡스러움을 꺼렸다.

지은이는 방의 여러 양태를 통해 시대별로 공과 사, 가정과 정치,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관계를 읽어낸다. 방의 공간적 배치는 사회적 계급, 세대, 남녀에 따라 다르고 방에 투영되는 그 관계의 의미 또한 세월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이 가능했다. 지은이의 관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방들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를 재현한다." 방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재해석된 죽음과 출생, 사랑, 노동, 여행, 형벌이 두툼한 페이지를 채운다.

"왕의 침실은 볼거리가 행해지는 곳이자 무대이고 권력의 핵심이자 도구였다. 따라서 왕의 침실은 결코 내밀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왕은 그곳에서 일어나고 잠자리에 들지만 거의 잠을 자지는 않았다. 공식적인 취침 의례가 끝나자마자 수석 시종은 거의 매일 밤 왕비의 처소로 안내했다… 이른 아침 수석 시종이 왕을 찾아와 기상 의례를 진행하고자 왕에게 침실로 되돌아가도록 했다."(68~69쪽)

이 책엔 실측이나 답사의 기록이 거의 없다. 삽화가 많아 각각의 주제로 나뉜 '방'의 윤곽을 시각적으로 추측하게 하지만, 지은이의 연구 방법은 건축이나 미술사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지은이는 말로 된 흔적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문제는 작고 밀폐된 방이라는 공간에 대한 문서로 된 증거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 지은이는 유산을 처분하면서 작성된 목록이나 범죄 조사관의 보고서, 편지, 일기, 실내장식에 관한 잡지, 위생학 입문서, 주거지에 대한 설문지 등을 뒤져서 방의 모습과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재구성한다.

지은이가 과거의 방의 형태와 용도에 대해 가장 많은 힌트를 찾아낸 곳은 문학작품 속이다.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의 작품처럼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운명뿐 아니라 그들의 침실까지 생생하게 묘사한 19세기 소설이 특히 쓸모가 컸다. 그들의 소설엔 거실이나 서재 외에 호텔방과 병실, 감옥도 중요하게 등장한다. 덕분에 이 책의 내용도 풍부해졌다. '죽어가는 사람이 고통과 불안을 홀로 간직할 권리를 쟁취한 공간(병실)', '비밀의 피난처이자 자아 발견을 갈구하는 격리의 공간(감옥)' 같은 것들이다.

내밀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과 잠, 휴식, 출생, 욕망, 사랑, 사색, 은둔, 죽음 등 인간의 존재 형태는 결국 방이라는 공간으로 수렴된다. 우리가 밤마다 돌아가 눕는 작은 육면체의 공간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는 새삼 깨닫게 한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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