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하루 지난 어느 가을 날. 탐스럽고 먹음직한 빨간 사과 하나가, 사과보다 더 아름다운 그 여인의 손 안에서 같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여인의 벤치 앞에 멈춰 섰다. 빨간 사과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이리저리 만지작 만지작, 움직였다. 사과는 나를 보고 미소 짓는 듯 했다. 지금은 멀고 먼 하늘 나라로 갔지만 그녀가 보고 싶다. 그리운 그 사람, 사랑하는 그 사람, 빨간 사과."
폭염을 피해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이 동네 앞 고층빌딩 그늘로 모여든 10일 오후. 동네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초점 잃은 눈을 깜빡이며 길에 주저앉아 있던 이 시간에 이웃 김두천(59)씨는 언덕배기 서울역쪽방상담소 지하강당에서 자신의 수필을 소리 내 읽고 있었다. 플라스틱 걸상에 옹기종기 앉아 경청하던 이들의 박수가 터졌다. "강당에 곰팡이 냄새가 너무 심하다"던 누군가의 불평은 더 나오지 않았다. 식당 가스 폭발 사고로 먼저 떠난 아내를 생각하며 27년 전 처음 만난 순간을 적었다는 김씨의 사연까지 들은 고영직 문학평론가는 "이거 한번 (작품) 만들어 봅시다. 다음시간까지 시로 한번 써 보세요"하고 권했다.
10일 노숙인 자활지원단체인 빅이슈 코리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이 진행하는 동자동 쪽방촌의 '민들레 문화특강'이 두번째 문학수업을 마쳤다. 쪽방촌 주민 및 노숙인 등 주거취약계층에게 문학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된 이 특강에는 문학평론가 고씨가 재능기부로 무료강사를 맡았다.
이날 동자동 쪽방촌 수업에서는 고씨가 지난 주에 과제로 내 준 '그리운 그 사람'을 소재로 한 글쓰기 발표가 이어졌다. 김씨의 바통을 이어 받은 장이성(가명ㆍ59)씨는 40여년 전 부산의 고무신 공장에서 일할 때 만난 첫사랑에게 편지를 썼다. 장씨는 "다리가 불편했던 그녀가 비오는 날 국제상사 화장실 앞에서 미끄러졌을 때 일으켜 세워 준 게 인연이 됐다"며 "어머님의 반대로 고백도 못한 채 서울로 일자리를 옮기면서 헤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가 참 아름답고 소중한 때였다"며 수줍게 웃었다. 희미하지만 잊을 수 없는 잔영으로 남아 있는 66년 전 동심을 기록한 이도 있었다. 김진수(가명ㆍ71)씨는 "맑고 밝은 날 집 앞 마루에 다섯살 남자 아이가 지나가는 사람들과 마차를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습니다. 동생들과 함께 동네 앞 들판을 지나는 냇가에서 쪽대 그물로 잡은 물고기. 사내아이도 계집아이도 마냥 행복한 모습입니다"라며 담담하게 먼 과거를 회상했다. 수강생 10명 가운데 7명이 해 온 숙제 가운데는 사채 광고지 뒷면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도 있었다.
고씨는 "인문학이 가진 힘이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을 추구할 능력과 욕구를 끌어내는 것"이라며 "문학이 (쪽방촌 주민들에게) 당장 해 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느낀 이들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찾고,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해 생각할 힘을 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민들레 문화특강은 고씨 등 20여명의 문인들이 재능기부로 강사를 맡아 9월까지 서울역쪽방상담소를 비롯해 서울의 20여개 시설에서 매주 1회씩 총 10회 강연 형태로 진행될 예정이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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