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로하신 분들께는 송구하지만, 이만큼만 살아도 나름 이런저런 이치를 터득하게 된다. 변화무쌍, 예측불가 세상사에서 오직 '순환법칙'만이 불변이라는 깨달음도 그런 것이다. 현상의 지속이란 없으며, 늘 오르내리는 사이클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신파조로 하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고, 시인처럼 말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다.
남북한간 일촉즉발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봄 이런 칼럼을 썼다. '곧 이 위험한 시기가 지나면서 상황호전의 단초는 개성공단문제 해결 같은 작은 분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역시 순환법칙을 믿은 때문이었다. 과연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전쟁이라도 터질 듯 긴박했던 게 언제인가 싶게 돌연 북한의 협상제안이 밀려들었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까지 한 묶음 들이밀었다. 얼마 전까지 "불벼락" "원쑤 격멸" "벌초" 등의 막말을 쏟아내던 같은 입에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과 평화번영" 같은 달콤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안색 하나 안 바꾸고 표변하는 북한이 새삼스럽지 않지만 참, 적응하긴 쉽지 않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이만큼 겪었으면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말고 이젠 중심 좀 잡을 필요가 있다. 다들 남북관계가 파탄 난 듯하다 곧장 분홍빛 전망에 들뜨더니, 당국회담 무산으로 분위기는 또 곧바로 싸하게 가라앉았다.
남북관계에서 유화국면은 어김없이 도발의 전 단계였고, 긴장국면은 또 다른 접촉의 시작이었다. 1983년 우리 정부요인들을 폭사시킨 아웅산테러 이듬해 북한은 수재물자를 보내왔고, 3년 뒤 KAL기 폭파로 무고한 민간인 100명 이상을 몰살한 얼마 뒤에 남북고위급회담이 있었다. 금강산관광,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 상봉의 감격과 연이은 서해도발, 핵실험 등에 대한 분노가 정신 없이 뒤엉킨 이후 10여 년 세월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금붕어 기억력이 아니라면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에 매번 호들갑 떨 일이 아니란 얘기다.
문제의 핵심은 지금까지의 남북관계가 철저하게 북한의 게임이었다는 점이다. 북한이 도발하면 허둥지둥 대응하고, 순식간에 바뀌어 유화 제스처를 취하면 황망히 손을 부여잡는 일의 반복이었다. 게임의 룰은 언제나 북한의 필요에 따라 일방적으로 제시되고, 우리는 최대한 맞춰주는 식이었다. 우리의 첫 주도적 대북정책 틀이라는 햇볕정책도 지금 와 보면 북한이 마냥 맘 편하게 게임 할 환경을 만들어준 것에 불과했다. MB 때는 북한의 게임에 말려들지 않으려 잔뜩 움츠리고만 있다 당할 것 다 당했다.
격(格)과 급(級)을 따지다 이번 당국회담이 무산된 걸 두고 또 이런저런 비판이 많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남북관계 게임의 룰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때라면, 이번 우리측 대응은 전환기적 의미로 평가할만한 하다. 우리 식으로 게임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공정한 룰로 정상적인 게임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처음부터 몇 수 접고 들어가는 불공정 게임으로는 결국 어떤 합리적 진전도 이룰 수 없다는 건 지난 세월이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바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란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 핵과 도발은 철저히 불용, 가차없이 대응하되 별도의 교류 협력은 확대해 상호 이익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북이 정하는 일방적 게임의 룰을 더는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북한으로선 당황스럽겠지만 더 이상은 시험해볼 생각 말고 새 룰에 적응할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현실적인 젊은 층으로 내려갈수록 대북인식이 적대적이라는 여러 조사결과도 북한이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할 대목이다. 비판을 업(業)으로 하는 입장에서 어색하긴 하지만, 새로운 게임의 룰을 만들려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관한 한 긍정평가를 아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아쉬워도 이번 당국회담 무산에 크게 낙담할 일은 아니다. 통일까지 수없이 부침을 반복할 남북관계의 긴 여정에서, 이 또한 지나갈 일이므로.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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