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자정 전후가 된다. 이곳엔 주말을 제외하곤 창문에 불빛이 붙어있는 집이 드물다. 대부분 펜션이거나 민박을 치는 집들이고 실 거주하는 주민도 원주민들에게 동화되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을로 접어들면 군데군데 켜진 가로등만이 칠흑과 등을 지고 있다. 날벌레들이 치열하게 실을 감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가로등 불빛이 내 머릿속에도 켜지고 날벌레들이 한 방향으로 돌기를 멈추지 않는다. 가로등 불빛에서 벗어난 날벌레는 추락하고 만다. 내가 쉬는 숨도 내가 하는 생각도 멈출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영원히 순간밖에 살 수 없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으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나한테 죄를 짓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뽕나무 아래로 차를 옮겨 선루프를 열었다. 하루가 다르게 익어가는 오디를 바라보았다. 저 오디들이 떨어져 짓무르기 전에 끝내야 할 동화의 플롯이 떠올랐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내가 선택한 삶의 징검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염없이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어둠속으로 발자국을 옮겨놓아야 한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우는 소쩍새, 나는 최소한 소쩍새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는 글을 쓰고 자야 한다.
반은 도둑이 되어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어서 오시지요,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다. 센서 등이 꺼지기 전에 서둘러 계단 등을 켜고 2층으로 올라간다. 어제 펴놓고 접지 않은 접이식 침대가 어서 오르시지요, 얼룩말 무늬로 유혹한다. 생각을 많이 하면 나에게 지고 만다. 나는 가차 없이 접이식 침대를 접어 구석으로 밀어붙이고 책상에 앉는다. 핸드폰을 끄고 노트북 전원을 누른다.
위집 아저씨는 짐승을 키우고 몸에 좋다는 식물이나 열매의 즙을 내려 아름아름 찾아오는 손님에게 팔아 생계로 삼는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 낯을 보는 것만으로 웃음이 전염된다. 새벽 4시면 집 안에 불이 켜지고 어둑한 마당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밥 달라고 울기 전에 집짐승들에게 먼저 밥과 물을 주고 마당을 쓰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나도 그 시간이면 책상 거울을 당겨놓는다. 글을 쓰는 내가 웃고 있는지 보기 위함이다. 쓰는 사람이 즐겁지 않으면 읽는 사람도 그리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새소리가 방충망을 통해 밀려온다. 새들은 날거나 나뭇가지를 누르고, 것도 아니면 지붕 같은 데 붙어서 지저귄다. 이제 컴퓨터 그만 하고 잠 좀 자라는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원전 몇 기 가동 중단돼서 전기도 모자란데 밤새 뭐하는 짓이냐고 나무라는 소리 같다. 어두워지면 자고 날 밝기 전에 일어나는 게 순리라고. 새들이 입을 모아 떠드는 소리 같다. 가만히 생각하니 새들은 어두워지면 활동을 멈추고 날이 밝기 전에 같이 활동을 시작한다. 병든 새만 따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 시간이면 새소리가 알람이 되는 삶이 가능할까 내게 묻게 된다. 새소리가 깨우지 않아도 눈이 떠지고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일어나는 삶의 소중함을 이곳에 와서 알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삶을 거스른 지 너무 오래다. 스스로 쫓기면서 쫓기는 줄 몰랐다. 벌써 일중독이 되었는데 모르고 사는 나를 발견한다. 밤새 방충망에 붙어 파닥거리다 테라스 바닥에 뒤집힌 흰 나방들을 본다. 내 삶도 내 글도 저리 될까 두렵기만 하다.
텃밭으로 내려가 하루 동안 쑥 자란 오이 하나를 따 한 입 베어 문다. 내가 지은 책을 펼쳐 읽는 독자에게 이런 맛을 전달할 수 있을까. 순리대로 사는 것, 여유를 갖고 과정을 즐기는 삶이 지금 내게 필요하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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