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지브롤터해협에서부터 우랄산맥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의 넓이는 대략 1,000만㎢다. 이걸 500분의 1로 축소하면 뭐가 될까. 파리 디즈니랜드? 엘튼 존의 정원? 답은 슬로베니아다. 2만 273㎢. 국토의 크기가 딱 전라도 만하다. 인구는 약 200만 명. 그런데 이 작은 나라 안에 다 있다. 알프스의 설산이 있고,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이 있고, 광천수 샘솟는 온천 지대가 있고, 해바라기로 덮인 와이너리 평원이 있고, 말 탄 기사를 마주칠 것 같은 중세의 도시가 있다. 슬로베니아에선, 그래서 축지법에 서툴러도 이런 하루가 가능하다. 아침엔 고딕 교회의 종탑 아래 노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점심 땐 선글라스를 쓰고 그리스식 농어 요리를 즐긴 뒤, 저녁은 알프스 산장에서 칼로리 가득한 나무꾼의 스테이크를 맛보는 하루. '유럽의 미니어처(Europe in Miniature)'. 그것이 여태 한글로 된 가이드북 하나 없는, 그래서 아직은 조금 낯설게 느껴질 이 매력적인 나라의 별명이다.
줄리안 알프스, 푸르름에 싸인 설산
스위스부터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알프스 산맥의 절반 이상은 사실 오스트리아 땅이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이 거대한 산맥에 발을 걸친 유럽의 나라들도 모두 제 나름의 알프스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슬로베니아도 갖고 있다. 줄리안 알프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댄 북서부 산악지대를 일컫는 이름이다. 표고 2,864m의 트리글라브 등 2,000m 이상 고봉이 줄줄이 이어진 알프스의 낙맥(落脈)이다. 유월까지 잔설이 남아 있는 깊고 우뚝한 산악지대다. 1924년 일찌감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보호해 왔을 만큼 이 나라에선 성스러운 곳이다.
"죽은 아내의 이름이에요. 물론, 지금의 아내도 사랑하지만."
'줄리안 알프스의 진주'라는 블레드 호수에서 배를 탔다. 노 젓는 사내에게 이물에 새겨진 아니카(Anica)라는 배 이름을 물었더니 그렇게 대답했다. 전 유럽에서 손꼽히는 절경인 블레드 호수엔 배가 23척뿐이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 때부터 그랬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이 여걸은 블레드 호수가 고요한 순례지로 남길 원했다. 여제는 딱 23척의 조각배만 허가했다. 그 숫자가 200년 넘게 지켜지고 있다. 뱃사공 일은 가업으로만 전해진단다. 호수엔 섬이 하나 있고 섬엔 1,000년도 더 된 교회가 있다. 그윽한 눈빛의 사내가 노를 저었다. 에메랄드 그린의 물살을 가르며, 교회의 첨탑이 천천히 다가왔다.
더 북쪽으로 갔다. 도로는 왕복 2차선으로 좁았다. 산맥의 주름이 두터워지고 침엽수림의 녹색 그늘이 깊어졌다. 녹지 않은 지난 겨울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전형적인 알프스의 풍광이다. 안내를 해준 준 미스 시모나 마그딕의 고향이 이 지역. 전엔 '세상의 끝'으로 불렸던 외진 곳이었단다. 옛날 얘기를 들려줬다. 레스체라는 고향 마을엔 돈 많고 장난 좋아하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하루는 얼굴을 까맣게 칠하고 기차를 통째로 빌려서 타고 나타났다. 아프리카 왕의 방문이라는 그의 장난은 너무 잘 먹혀서 지방 신문에 나고 말았다. 그만큼 외부로부터 고립됐던 지역이라는 뜻. 수려한 산과 계곡보다 농촌의 질박함이 머물고픈 풍경이다.
피란, 아드리아해를 품은 도시
겨울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줄리안 알프스에서 차 타고 고속도로 위를 두 시간 반. 거짓말 하듯 세상이 바뀌었다. 바다, 아드리아해의 수평선이 현란한 보석 빛깔로 파도를 일구고 있었다. 북위 40도의 지중해만이 보여줄 수 있는 화이트 사파이어의 바닷빛. 사람들의 표정도 달랐다. 하늘하늘한 옷차림과 넉살 좋은 수다. 가볍게 그을린 그들의 얼굴엔 '나는 낭만을 원해요' 하는 친밀하고, 조금은 뻔뻔한 긍정주의가 찰랑대고 있었다. 이탈리아인에 가까운 표정이다. 살구색, 연두색, 핑크색, 베이지색, 하늘색으로 벽을 칠한 집들이 똑같은 담홍색 지붕을 이고 등을 맞대고 있다. 그 속을 걸었다.
피란은 반도라기보다 곶에 가까운 삐죽한 지형이다. 로마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지만 도시를 일으킨 건 13세기 베네치아 사람들이다. 시청사와 법원 등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광장은 본래 배가 들어오는 항구였다. 광장 가운데 동상은 바이올린의 시조로 불리는 18세기 이탈리아 음악가 타르티니다. 왜 그를 그리는 동상을 여기다 세웠을까. 다른 곳이었다면 아마도 그런 류의 질문으로 시모나를 귀찮게 했을 텐데,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을 산책하는 맛과 올리브 기름으로 굽고 튀기는 음식 냄새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 공부는 나중에 하자. 랄랄라, 나는 계속 놀았다.
"잘 봐. 저게 무슨 코카콜라야."
노천 레스토랑의 점심 메뉴는 후추와 바질, 소금만으로 살짝 양념한 오징어 튀김과 모둠 조개 요리.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오크족의 음식 같은 줄리안 알프스의 스테이크보단 역시 이런 게 한국인의 입맛엔 잘 맞다. 맞은 편 레스토랑엔 족히 오십 년은 된 듯한 코카콜라 간판이 걸려 있었다. 어디서 비싸게 주고 사 온 빈티지 소품인가 싶어 물었는데, 돌아온 시모나의 대답이 핀잔에 가까웠다. 자세히 읽어보니 'Coca-Cola'가 아니라 'Sara-Jevo(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수도)'다. 글씨를 교묘하게 비틀어서 코카콜라처럼 만들었다. 이하는 '식후땡' 하면서 나눈 대화를 간추린 것.
"너네, 유고 연방 탈퇴한 지 꽤 됐잖아?" "그랬지." "근데 왜?" "첨엔 서유럽에 속하는 게 마냥 좋은 줄 알았어. 살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애." "뭣땜에?" "분명 살림살이는 나아졌는데… 왠지 살기가 갈수록 팍팍해져" "그래서, 저건?" "복고주의지. 적어도 옛날엔, 이렇게까지 남들과 비교하며 살지 않아도 됐으니까."
카르스트, 장엄한 언더월드(Underworld)
고씨동굴이 있는 영월 같은 석회암 지형을 카르스트 지형이라고 한다. 카르스트(Karst)는 슬로베니아의 서부 지방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어원은 'Krs'.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돌이 많은 지역'이라는 뜻이다. 눈치챘겠지만 전형적인 석회암 지대가 슬로베니아에 있다. 그런데 규모가 좀 크다. 허리를 굽히고 기다시피 석회 동굴에 들어가본 경험을 떠올리며 이곳의 동굴에 간다면, 우선 그 거대한 크기에 입을 쩍 벌리고 만다. 동굴 속에 폭포도 있고 암벽도 있고 강도 흐른다. 그런 굴이 몇 ㎞씩 뻗어 있다. 그런데 저승의 입구 같은 이곳에 1만년도 더 된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인간은 정말 대단한 종이다.
스코찬 동굴은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으로 등록된 세계 유일의 석회 동굴이다. 규모로 따지자면 포스토이나 동굴이 더 크다. 하지만 포스토이나가 일찍 관광지로 개발된 탓에 이곳만 유산으로 지정됐다. 스코찬은 사실 규모가 꽤 큰 협곡이다. 굽이치고 휘몰아치고 꺾어져 낙하하는 물살이 육중한 바위 사이를 흐른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땅 속에 있다. 한정된 인원만, 가이드를 따라서만 동굴 속을 둘러볼 수 있다. 위험해 접근이 쉽지 않았던 탓에 손상이 거의 없다. 눈 앞의 지하세계는 아름답다기보다 장엄했다. 45m 높이의 아슬아슬한 다리를 건너야 하는 곳도 있었다. 섭씨 6도의 동굴 속에서 흘리는 식은땀은 영하 50도는 될 법하게 찼다.
인구 밀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슬로베니아엔 딱 한 곳에 지하철이 있다. 그게 포스토이나 동굴 속이다. 말도 안 되게 거대한 규모와 꾸역꾸역 밀려드는 유럽 전역의 관광객 탓에 선택한 방편이다. 그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가야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구역이 나온다. 뭐든 크다. 종유석도 석순도 석회 연못도 한국에서 본 것의 열 배는 족히 된다. 150여종의 동물이 이 지하세계 산다. 뱀장어처럼 생겼지만 사람처럼 팔 다리를 가진 휴먼 피시가 유명하다. 실수로 휴먼 피시가 10년 넘게 대학 실험실에 갇혔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 시간 동안 살아 있었단다. 강하다. 문득, 스태미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시모나, 한국인 관광객들에겐 그런 것까진 설명해주지 마." "왜?" "음… 그냥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류블랴나, 인디한 분위기의 중세도시
마지막 날, 류블랴나에 왔다. 슬로베니아에 가봤던 어떤 친구는 "20분이면 더 이상 볼 게 없을 만큼 작은 도시"라고 했었다.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지 않는 한 그렇진 않다. 물론 한 나라의 수도라기에 도시는 무척 아담하고, 관광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구시가는 더욱 작은 건 사실이다. 또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했었다. 먹물이 좀 든 좀 친구다. "메모지와 사인펜을 지니고 다녀. 슬라보예 지젝을 마주치게 될 수 있으니. 만나면 싸인 좀 받아다 주고." 그런데 막상 류블랴나에서 지젝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21세기 인문학의 아이돌은, 좀체 자기 나라 말로는 책을 쓰지 않는단다. 변방에서 스타가 되는 방법은 어디나 비슷한가 보다.
각설하고, 류블랴나는 대부분 관광객이 비행기를 타기 위해 하룻밤 머무르는 곳 정도로 인식하지만, 이곳은 짐을 풀어 놓고 며칠 보내도 날마다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만큼 매력적이다. 도시의 관광지 소개는 어디서나 2유로 주면 살 수 있는 안내 가이드에 상세히 나와 있으니 생략한다. 다만 이러한 경험을 말하고 싶다. 언덕 위의 성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마당이 시끌시끌해졌다. 인도에서 온 영화 제작자들이 중세의 성곽 안에서 특유의 발리우드 뮤지컬을 찍고 있었다. 검은 피부, 흰 피부, 배꼽티, 기사의 갑옷. 웃겼다. 그런데 나 혼자 웃고 있었다. "안 웃겨, 시모나?" "뭐, 이 도시는 원래 늘 이래."
저물 녘 해지는 거리를 혼자 걸었다. 노을 내리는 하늘엔, 어느 거리 미술가의 작품인지 낡은 구두가 가득 걸려 있었다. 구스타프 말러의 동상 앞에선 길거리 록 밴드의 버스킹이 한창이었다. 젊음. 아마도 그것이, 이 좁고 오래된 도시를 무척 크고 새롭다고 느끼게 만드는 비밀인 듯했다.
■ 여행수첩
●슬로베니아로 가는 직항 항공편은 없다. 한국과 직항막?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공항은 독일의 뮌헨 공항이다. 류블랴나까지는 슬로베니아 국적 항공사인 아드리아에어(www.adria.si)를 이용하는 편이 가장 저렴하다. 중부 유럽과 발칸반도를 잇는 주요 열차편도 류블랴나를 거쳐 간다. 슬로베니아 안에서 이동할 땐 버스가 편하다. 버스 시간 확인 www.ap-ljubljana.si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늦고 기온은 한국보다 선선한 편이다. 비자는 필요 없다. 통용되는 화폐는 유로화.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줄리안 알프스 지역은 스키와 하이킹 인프라가 훌륭하고, 지중해 쪽엔 휴양 시설이 모여 있다. 카스트르 동굴 지대 근처에선 세계적 명마인 리피차종 말로 승마 체험을 할 수 있다. 슬로베니아 여행 정보 www.slovenia.info
슬로베니아=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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