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대선 열기가 한창이던 지난해 12월 11일. 문재인 후보 측은 "국정원 직원이 인터넷에 문 후보 비방 글을 무차별적으로 올리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경찰과 선관위에 신고했다. 그가 거주하고 있는 강남의 오피스텔에 선관위와 경찰 관계자, 민주당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는 자료협조 요청을 거부하고 문을 잠가 38시간 동안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새누리당은 "정황만을 이유로 젊은 여성이 거주하는 오피스텔에 몰려가 불법 감금한 것은 인권 유린"이라며 비난했다. 이틀 후인 13일 김씨는 컴퓨터 2대를 제출했고, 경찰은 분석에 착수했다. 15일에는 김씨에 대한 소환조사가 진행됐고, 다음날인 16일 심야에 경찰은 "대선 관련 댓글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 후보의 사과를 요청하는 등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그리고 사흘 뒤 선거가 치러졌다.
만일 당시 경찰이 김씨의 컴퓨터에서 댓글 흔적을 찾았다고 발표했다면 선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대선에서 문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108만 표(3.6%) 차이로 졌다. 경찰의 엉터리 발표로 상승세를 타던 문 후보는 코너에 몰렸다. 민주당은 대공수사에 종사하는 국정원 여직원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한, 표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는 파렴치한 정당으로 비쳐졌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유권자들이 적지 않았다. 경찰의 수사가 제대로 돼 진실이 밝혀졌다면 상당수 유권자가 민주당으로 넘어왔을 것이고, 그 수가 50만 명이 넘었다면 대선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는 게 민주당의 주장이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고 싶은 심정일 게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처리가 2주일 넘게 미뤄진 이유는 바로 이 대목이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인정했을 경우 밀어닥칠 후폭풍을 걱정한 때문이다. 대선의 정당성에 흠집이 생기고 나아가 박근혜 정부에도 부담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진작부터 있었다. 새 정부 초대 법무장관인 황교안 장관으로서는 박 대통령에게 돌아갈 정치적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난리가 나도록 국정원 사건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박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를 일찌감치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사실 법리 문제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국정원이 정치에는 개입했지만 선거에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논리는 코미디에 가까운 얘기다. 평상시도 아니고 선거기간에 국정원이 정치 개입을 했는데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건 도둑이 담을 넘어 물건을 훔쳤는데 주거침입죄만 인정하고 절도죄는 인정하지 않는 격이다.
그러나 황 장관이 자신의 충성심을 '과시'하는 사이 국민들은 내막을 다 알아버렸다. 청와대가 정통성 문제에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권력을 위한 검찰이 아니라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공약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뒤늦게 원 전 원장에게 선거법을 적용해 기소했지만 때는 늦었다. 청와대와 황 장관은 이미 게도 잃고 구럭도 잃었다. 정권에 몸 담고 있는 자들은 그렇다 치자. 모처럼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나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온 일선 검사들은 이번에 다시 천형 같은 '정치 검찰'의 굴레를 확인하고 자괴감을 삼켜야 했다.
박 대통령은 마지막 TV토론에서 "국정원 여직원은 죄가 없다. 민주당에서 성폭행범이나 하는 듯한 수법으로 여직원을 감금하고 인권을 침해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사과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제 박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 그때는 진실을 몰라 말을 잘못했다고. 한 가지 더 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으로 정권의 정통성이 훼손된 데 대해서도 유감을 표명해야 한다. 어쨌든 국정원 사건의 최대 수혜자가 박 대통령인 건 분명하지 않은가.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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