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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칼럼/6월 12일] 마당의 잔디를 깎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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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칼럼/6월 12일] 마당의 잔디를 깎으며

입력
2013.06.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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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살면 절기의 변화에 맞춰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이제 슬슬 장마가 닥칠 텐데, 거기에 대비해서 해둬야 할 일의 하나가 마당의 잔디를 깎는 일입니다. 때를 놓쳐 장마철을 보내고 나면 잔디가 한 뼘도 넘게 웃자라기 때문에, 그때는 깎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장만해둔 기계가 수동식이기 때문이지요.

잔디를 깎는 기계에는 수동식과 모터식 두 종류가 있는데, 기계를 처음 구입할 때 공구상에서는 잔디밭 넓이를 묻더니, 한 330㎡(100평)쯤 된다고 하니까 모터식을 써야 한다고 하더군요. 두 방식의 기계를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약간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수동식으로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워낙 기계치여서,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모터식을 사용할 엄두가 안 났다는 것. 두 번째는 잔디를 깎는 일에까지 화석연료를 축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친환경주의적 '사명감'의 발로 때문 입니다.(시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이 더 절실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 몸뚱이를 이용해서 땀을 흘리며 잔디를 깎으면 운동도 되고 잔디도 깎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수동식이 모터식의 절반 가격도 안 된다는 경제적인 계산도 작용했지요.

기계를 부리는 일도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하더니, 몇 번 썼더니 슬슬 손에 익으면서 요령도 생기더군요. 마트에 사서 쇼핑카트를 미는 것과 비슷한데, 바퀴의 회전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속력을 일으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손발에 힘을 넣으며 약간 달려줘야 합니다. 잔디밭을 눈대중으로 구획해서, 처음엔 남북 방향으로 한 트랙씩 나갔다가 다시 역방향으로 나갑니다.

그렇게 10여 트랙을 오간 다음,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 동서 방향으로 오가면서, 아까 깎지 못한 것까지 정리합니다. 기계가 접근하기 어려운 모서리나 바위틈 같은 곳은 낫으로 베어내거나 정원가위로 잘라내야 합니다.

잔디 깎기의 즐거움은 먼저 그 소리에서 느껴집니다. 내 손이 기계를 밀고 나갈 때 회전 칼날이 돌아가면서 사각사각 풀을 베어내는 소리(그 없는 듯 들리는 청량한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 마음밭에 가득 자라난 온갖 근심과 분노와 초조와 불안의 잡풀들까지도 뎅강뎅강 잘려나가는 듯하여 마음이 한결 가뿐해집니다.

소리와 더불어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 또한 즐겁습니다. 칼날에 저항하는 풀들의 떨림이 기계 손잡이를 통해 내 손에 전해지고, 그때 느껴지는 생명력은 그것이 비록 목숨을 겨누는 칼날 앞에서 내지르는 비명이라고 할지라도 싱그러운 데가 있습니다. (아니, 내 마음에 이렇게 잔인한 구석이 있다니!)

또한 내 발은 기계가 지나가기 전과 지나가고 난 뒤에 달라진 잔디밭의 감촉을 구별하며 즐거워합니다. 나는 이 감촉을 더욱 즐기기 위해, 잔디를 다 깎고 나면 맨발로 돌아다닙니다. 그러면 이발한 듯 단정해진 잔디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꼿꼿하게 발바닥을 자극합니다. 한편으론 간지럽고 또 한편으로 찌르는 듯한 발바닥 느낌이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퍼질 때, 나는 대지의 기운이라도 받는 듯한 감각에 황홀해집니다.

다음은 코가 즐길 차례입니다. 풀잎 하나 꺾어도 향기가 나는데, 잔디밭을 깎은 자리에 어찌 향긋한 풀냄새가 진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인간의 후각에는 향긋하게 느껴지지만 풀의 입장에서는 피비린내에 다름 아닐 테니, 풀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 지독한 악어의 눈물!)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잔디 깎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기분 좋게 땀을 흘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 시간쯤 잔디밭을 깎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는데, 그게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습니다. 운동을 통해 일부러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평소 노동과는 무관한 생활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얼마나 즐겁고 뿌듯한 일인지 모릅니다.

번역가 김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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