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들어 우리 민족에게는 국운과 관련된 몇 가지 커다란 전환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식민지로 전락하느냐 마느냐 하는 전환기였다. 우리는 아쉽게도 이 전환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두 번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통일 독립국가를 성취하느냐 마느냐 하는 전환기였다. 이번에도 우리는 미소 강대국의 원심력이 한반도에 작용하는 바람에 분단국가로 남고 말았다. 자연히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는 번영된 통일국가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요즈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우리에게 국운 상승의 세 번째 전환기가 다가 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5월의 한미정상 회담에서 두 정상은 한미동맹과 한반도의 비핵화를 재확인했다. 얼마 전 끝난 미중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북한의 핵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파격적으로 합의했다. 중국의 대북한 정책이 서서히 바뀌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북한의 혼란 방지보다는 북한 핵문제가 중국의 국가이익에 더 큰 변수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듯하다. 다가올 27일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갖고 대북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야흐로 한미중 사이에 북한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국제정치의 구도에서 볼 때 독일보다는 우리가 먼저 통일되었어야 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로서 승전국에 의해 분단을 강요당했다. 일종의 벌을 받은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전범국가 일본이 분단의 벌을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한국은 전쟁의 책임도 없으면서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제정치의 역학상 누구도 전범국가 독일의 통일을 원치 않았지만 독일은 현명한 외교로 이를 극복했다. 한국은 독일과 달리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기에 "통일된 한반도는 동북아에 장기적 평화를 가져 온다"고 주변 국가들을 설득하는 데 독일보다 더 유리하다. 이번 한중정상 회담에서 박대통령은 한국 주도의 통일된 한반도가 중국의 국익에 더 부합한다는 점을 시 주석에게 설득해야만 한다.
한미중 사이에 북한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박대통령의 원칙에 근거한 대북정책이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와중에 북한은 느닷없이 당국 간 회담을 제의해 왔다. 북한은 핵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이산가족 문제를 통해 핵문제로 고립된 상황을 타개하려는 대남 유화공세 전술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 세 가지 의제 이외에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제안한 6ㆍ15, 7ㆍ4 공동선언 기념행사 공동개최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6ㆍ15와 7ㆍ4 공동선언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주'이다. 북한이 말하는 자주는 우리의 개념과 달리 외세배격이며 이는 주한미군 철수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북한은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국민적 합의를 이뤄 가고 있는 대북정책에 균열을 일으켜 남남갈등을 유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6ㆍ25전쟁 정전협상에 참여했던 미국의 터너 조이 제독은 자신의 저서 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엉겹결에 회의에 참여하거나 황급하게 협상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 먼저, 그들은 주의 깊게 무대를 설정한다"고 했다. 그리고 "공산 측과의 회담의제는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12일 열릴 남북 당국 간 회담의 우리 협상단은 특히 이 점에 유의해서 우리에게 불리한 의제가 설정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북핵 제거를 위한 한미일 동맹관계와 국제협력 관계를 약화시키는 방향의 남북대화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할 것이다.
75%의 국민들이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협상단은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협상에 임해 통일의 기운을 살려 나가야 할 것이다.
이철순 부산대 정치외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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