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도 이른 더위가 찾아왔다. 도심 아스팔트는 30도를 오르내리는 햇빛에 달구어져 혀를 빼물 정도의 열기를 훅훅 뿜어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고, 그 해 초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경찰 고문으로 숨진 사실이 한 달 전 밝혀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날씨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1학기 종강을 앞둔 대학가는 연일 최루탄 연기로 뒤덮여 수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서울시청 앞은 아예 경찰의 상시 주둔지로 변한 지 오래였다. 1987년 6월이었다.
▲ 전 시민사회와 대학생들이 총집결하는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이른바 ‘6ㆍ10 대회’를 하루 앞두고 정국은 어느 때보다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지친 몸을 끌고 귀사해 잠시 한숨 돌리던 저녁 시간, 돌연 연세대생이 최루탄 파편에 뇌를 다쳐 의식불명에 빠졌다는 다급한 정보가 들어왔다. 황급히 다시 달려간 신촌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주변은 이미 격앙된 학생들로 꽉 들어찼다. 그날 낮 경찰이 쏜 최루탄에 직격당한 것이었다.
▲ 박종철에 이은 또 한 명 학생이 무도한 공권력에 희생되자 민심은 드디어 대폭발했다. 점심시간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30, 40대 회사원들까지 분노해 시위에 뛰어들었다. 최루탄 파편과 깨진 보도블록으로 도심은 차가 제대로 다닐 수 없는 비포장도로처럼 변해버렸다. 매일 시위규모는 전국 5, 60개 대학에 수만 명씩 됐다. 6월 한 달 동안 경찰에 체포, 연행된 인원이 연 1만 명을 넘었다. 마침내 정권은 ‘6ㆍ29 선언’으로 손을 들었다.
▲그렇게 세상이 승리의 여운에 취해있던 7월 5일 새벽 이한열은 끝내 세상을 떠났다. 나흘 뒤 장례식 날 서울거리는 수백만 애도인파로 뒤덮였다. 단언컨대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만하지 않았다. 피 흘리며 친구에 팔에 안긴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대로 시대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당시 피 젖은 셔츠 등 이한열의 유품이 세월에 삭고 부스러져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26년이 흘렀다. 뜨겁고 잔인한 그 해 여름으로부터.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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