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미시간,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미국의 이 5개 주는 공통적인 골칫거리를 안고 있다. 사람들이 살기를 꺼리는 벌판이 한 군데씩 있다는 점이다. 모두 과거 원자력발전소가 있었던 곳이다. 수명을 다한 원전을 해체한 뒤 생물이 살 수 있는 땅으로 '안전하게' 복구했다고 미국 원자력 당국은 설명한다. 어떤 벌판은 녹지로 볼 수 있을 만큼 풀과 나무가 적잖이 자란다. 하지만 사람들이 여간 해선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 쓴 원전을 해체하고 원전이 있던 땅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건 원전을 이용하는 나라들이 앞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미래 원전 안전은 건설부터 운영, 폐로(원자로 폐기), 지역 복구의 순환 시스템 차원에서 확보돼야 한다.
건설과 운영 분야의 발전 속도에 비해 폐로와 복구 경험의 축적은 더디기만 하다. 세계 어느 나라도 자신 있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달리 생각하면 그래서 지금이 기회다. 반갑게도 세계의 안전한 폐로 연구를 주도하는 움직임이 최근 국내에서 시작됐다.
폐로 경험 단 3개 나라뿐
원자력 학자들의 표현을 빌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고를 겪은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일대는 지금 '동물의 왕국'이 됐다. 어마어마한 양의 콘크리트로 덮인 원자로 인근 들판엔 풀과 나무가 자라고 동물들만 눈에 띈다고 한다. 사람의 접근은 거의 없다. 체르노빌이야 대규모 사고가 있었던 지역이라 어쩔 수 없다 쳐도 별다른 사고 없이 다 쓴 원전을 해체한 지역들마저 이렇게 변한다면 육지의 상당 부분이 쓸모 없는 땅이 돼버릴 것이다.
사람들이 원전 해체 지역에 가지 않는 이유는 물론 방사선 때문이다. 핵분열 반응이 수없이 일어났던 원전 부지 전체에서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을 완벽하게 제거하려면 최소 15년은 걸릴 거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원전 건물 자체뿐 아니라 주변 토양과 지하수 등에서도 방사성물질 제거 작업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원전의 절반 이상이 30년이 넘은 걸 감안하면 국제 사회는 훨씬 일찍부터 원전의 안전한 해체를 고민했어야 한다.
원전을 해체해 본 경험이 있는 나라는 아직까지 미국과 독일, 일본뿐이다. 그나마 독일과 일본이 각각 해체한 3기와 1기는 모두 용량이 시험용 또는 연구용 수준이다. 그 중 3기는 일반적인 발전용 원전 용량의 10분의 1에도 크게 못 미친다. 결국 실질적인 원전 해체 경험이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한 셈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영구 정지 후 해체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원전이 자그마치 130여 기다. 대부분의 원전 국가들이 하나 같이 건설과 운영, 계속 운전에만 열을 올려온 탓에 선뜻 폐로와 지역 복구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구 정지가 결정된 원전만 꼭 해체 대상인 건 아니다. 후쿠시마처럼 대규모 사고가 일어난 뒤 제대로 된 해체 능력을 확보하고 있느냐가 앞으로는 그 나라 원전 안전 수준을 판가름하는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김용수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원전도 이제 태어나고 죽는 사이클이 자연스럽게 순환돼야 한다"며 "해체야말로 향후 세계 원전 기술을 선도할 수 있는 분야"라고 강조했다.
정지부터 해체까지 20년 이상
원전을 해체하는 첫 번째 절차는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는 중심부인 노심을 식히는 것이다. 수백~수천도를 오르내리던 노심을 기계로라도 다룰 수 있을 정도까지 온도를 낮춰야 한다. 영구 정지가 결정된 뒤 노심을 식히는 데만 수 년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 식으면 원전 구조물과 설비에 묻어 있는 방사성 물질을 씻어내야 한다. 수십 년 동안 노출돼왔으니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내부 온도를 낮춰도 방사선 때문에 사람은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노심 근처에 10초만 머물러도 세포와 유전자가 바로 손상되고 변형돼 절명하고 만다. 방사선에 잘 견디는 특수한 원격 제어 로봇이 필요하다.
다음은 절단이다. 원전, 특히 노심 주변 구조물은 굉장히 두껍다. 혹시 일어날지 모를 폭발이나 방사성 물질 누출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두께 1m가 넘는 콘크리트 안에 세관이 수천 개씩 얽혀 있다. 이걸 들어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일일이 잘라야 하는 것이다. 보통 산업 현장에서 쓰는 절단기로는 어림 없다. 특수 레이저나 플라스마를 총동원해야 한다.
잘라낸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게 다음 단계다. 모두 영구적으로 묻을 건지, 선별해 일부를 다른 원전이나 산업 분야에 재활용할 건지 결정도 쉽지 않다. 묻으려면 장소가 문제일 테고, 재활용하려면 또 다른 안전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원전을 해체한 뒤에는 최종적으로 부지 복구가 남는다. 토양과 지하수까지 모두 방사성 물질 제거 작업을 얼마나 지속해야 사람이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게 되는지는 아직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
영구 정지 후 해체가 완료된 원전은 소용량 원자로를 포함해 세계적으로 총 18기다. 정지 후 해체까지 짧게는 2년, 길게는 20년이 넘게 걸렸다. 1970년 해체된 미국 원전 엘크 리버의 부지는 현재 화력발전소 용지로 쓰이고 있다. 이를 제외한 원전 해체 부지는 대부분 다시 원자력 관련 산업 시설이 들어서거나 별다른 활용 방안을 찾지 못한 실정이다. 원전 해체가 시작된 지 4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10월 세계원전안전해체학회 창설
우리나라는 폐로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정부가 원전을 운영하고 수출하는 데만 집중할 뿐 "해체에는 여전히 느긋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는 "일부 미국 원전 말고는 해체 사례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다 못해 뜻있는 몇몇 국내 학자들이 나섰다. '세계원전안전해체학회(EDENS)'를 창설해 국제 사회의 인력 양성과 기술 축적을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건설부터 운영, 계속 운전, 영구 정지, 폐로, 부지 복구까지의 원전 순환 시스템 전체를 장기적으로 안전하게 이끌어가려면 무엇보다 해체 기술 확보가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학회 창설에 참여하는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우리나라가 비록 경험은 없어도 원자력 기술과 정보 기술을 융합하면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해체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DENS 준비위원회는 지난 3월 한양대에서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고, 이달 20일 서울대에서 국내 심포지엄을 진행한다. 창립 총회는 10월이다. 일본과 중국, 독일, 미국, 인도,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이 합류 의사를 밝혀왔다고 준비위원회는 전했다.
원전 해체 분야는 원자력산업의 블루오션이기도 하다. 서 교수는 "원전 한 기를 해체하는데 국내에선 약 6,800억원, 독일에선 사용후핵연료 처리 비용까지 포함해 2조7,000억원이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규 원전 한 기 건설에 3조원 가까이 필요하다는 걸 감안하면 짓는 비용이나 부수는 비용이나 비슷한 수준이다. EDENS 준비위원회에 따르면 세계 원전 약 440기의 해체 시장 규모는 900조원에 육박한다. 해체 기술을 발 빠르게 확보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시장을 선점할 기회이기도 하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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