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일본 나가노의 600년 된 사찰 법당에서 동네 주민 합창단이 노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의 작곡가 단체가 페스티벌 프로그램의 하나로 준비한 공연이었는데, 전문 연주자들로 이뤄진 오케스트라가 주민 합창단과 호흡을 맞춰 멋진 음악을 선사했다. 주민들은 이를 위해 1년 전부터 열심히 연습을 했다. 덕분에 법당의 부처님과 보러 온 손님들은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음악 공양을 받았다.
잊고 있던 오래된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은, 지난달 전남 강진의 천년 고찰 백련사로 첼로 녹음을 보러 가는 길에서였다. 한옥에서 국악 음반을 녹음해 온 음반사 악당이반이 5년에 걸쳐 첼리스트 박정민의 연주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녹음하는 일정 중 4번의 녹음 장소로 백련사 만경루를 택했다. 목조 건물 2층 누각의 대청마루에서 밤에 녹음을 했다. 낮의 더위가 한풀 꺾여 선선한 바람 불고 보름달이 둥실 뜬 가운데, 고요한 산중 절간에 울려 퍼지는 첼로 소리를 가장 잘 들은 것은 만경루 앞 잘 생긴 배롱나무였을 것이다. 백련사를 에워싼 천연기념물 동백나무 숲의 나무들도 귀를 쫑긋 세웠으리라.
콘서트홀이나 녹음 스튜디오를 놔두고 굳이 절간을 녹음 장소로 택한 데는 한옥을 비롯한 이 땅의 건축 공간을 '소리의 집'으로 재발견하려는 악당이반 김영일 대표의 의지가 작용했다. 국내 클래식 음반사가 거의 다 죽어버려 한국인 연주자의 음반도 외국의 메이저 음반사가 내줘야만 들을 수 있게 된 현실을 속 상해 하는 그는, 한국인의 연주를 이 땅의 고유한 공간에서 우리 손으로 녹음해 우리 레이블로 이 땅에 남기고자 한다.
그는 한옥이야말로 최고의 자연 스튜디오라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대청마루가 깔린 목조 건물은 그 자체로 훌륭한 울림통이다. 순천 송광사나 청도 운문사의 새벽 예불에 참석해 본 사람들은 금방 동의할 것이다. 나무로 된 건물이 통째로 울림통이 되어서 내는 소리가 얼마나 감동적인 음악인지 말이다. 한옥의 창호지 문이 지닌 필터 효과도 특별하다. 햇볕과 바람과 소리를 적절히 걸러내는 창호지 한 장의 마술은 흡음재를 써서 바깥 소리를 강제로 차단하는 밀폐형 녹음 스튜디오에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땅에는 널린 게 녹음 스튜디오다. 오래된 고택도 좋고, 향교나 서원도 좋겠다. 녹음 중에 끼어드는 다른 소리는 죄다 박멸해야 할 소음으로 여기지 않는 한, 선택 폭은 아주 넓어진다. 악당이반의 음반에는 새 소리도 들리고 바람 소리도 들린다. 안동 병산서원의 탁 트인 누대에서 녹음한 음반은 멀리서 우르릉 달려오는 천둥 소리가 낮게 깔려 정취를 더한다. 김 대표는 사람이 살기 전부터 집과 그 터에 살아 온 풀벌레며 새며 바람도 집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녹음할 때 크게 거슬리지 않는 한 그들을 일부러 ?아내려 하지 않는다. 이 작은 음반사를 눈여겨 보는 것은 여기서 만든 음반이 2년 전 한국 음반으로는 처음으로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보다, 소리에 대한 바로 이런 태도가 미덥고 고맙기 때문이다.
그가 한옥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음향이 좋은 작은 교회나 성당 같은 곳에서 녹음을 해도 되지만, 그런 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는 집마다 고유한 소리가 있다고 말한다. 한옥을 비롯한 이 땅의 건축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하는 녹음은, 소리로 한국적 공간의 지리지를 작성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그 날의 날씨와 햇볕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과 뭇 생명의 숨결까지 한데 어울리고 스며들어 규격화한 '통조림 음악'이 줄 수 없는 감흥을 더할 것이다.
건축물을 소리의 집으로 다시 보는 이런 시각은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을 뿐이지 따지고 보면 자연스런 일이다. 집집이 품고 있는 고유한 소리를 찾아내 음악을 담는 그릇으로 쓴다는 발상이 참신하다. 악당이반 외에는 아직 어디서도 이런 작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시도해볼 만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오미환 문화부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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