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의 외곽 도시 록빌의 원자력규제위원회(NRC) 본부. 이곳 비상운영센터에서는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대비하는 독특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직원들 거의 대부분을 3, 4개월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아 원전 사고가 났을 때 미국 내 다른 주정부와 의회, 국내외 언론과 각국 규제기관 등의 문의에 실시간 응답해줄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자신들의 일을 외부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원전 밖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직원들은 훈련을 통해 생생히 체험하게 된다.
NRC 원자력안전대응 담당 스콧 모리스 부감독은 "진짜 사고상황 때는 이들이 센터 내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핵심 원전 관계자들의 주요 회의 내용을 직접 들으면서 각계의 문의에 실시간 대응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미국 내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원전 사고와 일본 후쿠시마 사고 때도 이 프로그램이 작동했다.
한국의 원자력계는 원전 관련 설명이 홍보 담당으로 일원화해 있다. 무슨 일이라도 났을 때 원전 안전 관계자들은 언론 등의 문의에 대체로 "공식 답변이 어렵다"며 홍보실에 물어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홍보실은 시간과 인력이 부족하다며 적시에, 충분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원전에 사고가 나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발표하고 처리하는 데 급급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세계가 안전 기준 올렸지만
작은 실수나 결함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위험을 안고 있는 원전에서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세계적으로 원전의 안전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을 포함해 원전을 운영하는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원전 상태를 점검해 미흡한 안전 설비를 보완하고 안전 기준을 상향 조정했다.
세계에서 가동 원전 기수가 가장 많은 미국은 원전 안전과 규제에도 적극적인 편이다. 스콧 버넬 NRC 홍보담당관은 "후쿠시마 사고 직후 후쿠시마 원전과 비슷한 유형인 미국 내 원전에 유해물질 배기 시설을 강화하도록 조치했고, 다른 원전 사업자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중대사고에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장기적으로 확보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원전이 많은 프랑스 역시 후쿠시마 사고 이후 강력한 후속조치를 취했다. 사고 후 12시간 안에 소집되고 24시간 내에 비상임무를 인수할 수 있는 사고관리 전문그룹 '신속대응팀'을 구성했고, 주제어실과 비상발전기 등 주요 설비가 극한사고 때 정상 기능을 담보하도록 방호하는 '벙커 콘셉트'를 전체 원전에 적용했다.
캐나다는 비상전력마저 바닥나는 '토털 블랙아웃' 때 원전을 2, 3초 만에 자동으로 멈추고 외부에서 이동용 안전설비를 투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새롭게 정비했고, 유럽연합(EU)은 후쿠시마 사고 직후 1년 4개월에 걸쳐 회원국 원전을 일제 점검했다. 그 결과 상당수 원전에서 안전조치 미비와 결함이 발견돼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 후쿠시마 사고 직후 국제원자력기구(IAEA) 수검으로 안전규제 체제 선진화를 위한 권고와 제안사항 20여 건이 도출됐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에 따르면 원자력 당국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 극한 상황에 대비하는 50가지 장단기 개선 대책을 세웠다. 2015년까지 완료하는데 약 1조1,000억원을 투입한다.
"제대로 된 점검 한 적 있나"
하지만 세계 각국 정부가 이처럼 대책을 쏟아내는 데도 불구하고 원전은 여전히 안전에 대해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시험검사를 조작해 원전 부품을 납품하는 한국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원전을 비롯한 기계설비의 고장 횟수나 결함 발견 건수 등을 세로축으로, 가동 시간을 가로축으로 놓고 그래프를 그리면 보통 'U'자 모양이 된다. 가동 초기엔 설비가 자체적으로 적응하느라 고장이 잦다가 어느 정도 지나면 급격히 안정되고, 수명이 다해가면 다시 고장이 크게 늘어난다는 의미다. 공학자들은 이 그래프를 욕조처럼 생겼다고 해서 '배스텁커브'라고도 부른다.
배스텁커브에 따르면 원전이 평균적으로 가장 안전한 시기는 가동 후 10~20년 즈음이다. 그래프가 다시 올라가는 시점이 30~40년쯤이 될지, 50~60년쯤이 될지는 사실 가동을 해봐야 안다. 그 전까지는 안전을 '예측'할 수밖에 없다. 예측은 곧 확률의 문제다. 공학적 관점에서 안전을 확보한다는 것은 일어날 확률이 아주 낮은 사고에 대해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설계한다는 것이다. 거의 일어날 법하지 않은 사고가 실제로 났을 때 위험해질 확률이 가장 낮은 상태로 원전을 설계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게 하더라도 확률은 어디까지나 확률일 뿐, 공학적으로 100% 안전한 원전은 있을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결국 원전 같은 시설은 안전을 누가 어떻게 실행하고 얼마나 책임지느냐가 최대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원전은 여러 차례의 안전 점검 장치가 있다. 주기적인 안전성 평가를 진행하고, 필요할 때마다 IAEA가 검사하고, 후쿠시마 사고 직후엔 별도로 대대적인 점검까지 마쳤다. 그런데도 "언제 제대로 된 점검 해본 적 있나" "그 정도로는 안심할 수가 없다"는 지적이 일부 전문가들과 국민 사이에서 나오는 이유는 뭘까. 안전을 실행하고 책임져온 사람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죽 하면 '원자력 마피아'
미국은 원전 사업자가 여럿이지만 한국은 하나(한국수력원자력)다. 이 같은 독점 구조는 빠른 시간 안에 일사분란하게 원자력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는 효율적이다. 실제로 50년도 안 된 짧은 기간 동안 한국은 20여기의 원전 운영 경험을 쌓았고, 최근 들어 수출까지 하며 세계 시장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갈수록 다양성과 (선의의)경쟁이 사라졌다"는 한 대학 원자력공학과 교수의 말은 한국 원전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맹점을 제대로 꼬집은 것이다. 심지어 "대학에 있는 연구자들조차 이른바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소신 있게 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 같은 상황에선 아무리 독립기구라 해도 원자력안전위원회가 힘을 발휘하기 쉽지 않다. 이 교수는 "실제로 지금까지 원안위가 선제적으로 강력하게 안전 확보 조치를 했던 적은 드물고, 번번이 사고 발생 후 뒤늦게 대책을 마련하는 등 소극적이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끼리도 자유로운 토론이 안 되는 마당이니 대중이 이런저런 정보를 얻고 의사를 개진하는 것은 바랄 수도 없다.
'원자력 마피아'란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으려면 대중의 신뢰를 얻기 위해 원자력계가 투명해져야 한다. 후쿠시마 사고 전부터 직원들의 대외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미국 NRC가 대중과의 소통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지난해 1월 가동 중인 한 원전에서 증기발생기가 파열됐다. 비상장비가 작동해 실제 문제가 생기진 않았지만 중요한 사고였다. 사고가 알려진 직후부터 질문이 쇄도했다. 일일이 답변한 다음 그 내용을 NRC 홈페이지와 블로그, 트위터, 유튜브 등에 공개했다. 이어 전문가를 섭외해 대중들과 라이브 채팅도 진행했다." 버넬 홍보담당관의 설명 대로 NRC는 감추지 않고 알릴수록 국민이 원전을 신뢰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워싱턴DC=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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