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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6월 8일] 국정원 사건과 '정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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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6월 8일] 국정원 사건과 '정통성'

입력
2013.06.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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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의 정통성 부재는 권력의 추동력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킨다. 왕조시대나 현대국가나 태생적 한계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민생과 생활정치가 아무리 중요해도, 정치는 명분을 토양으로 정책도 펼치고, 권력도 추구한다. 정통성의 근간은 절차적 정당성이다. 최소강령적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1987년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쟁취한 절차적 민주주의(procedural democracy)는 그래서 소중하다. 관점과 입장에 따라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기로 보든, 실질적 차원의 평등이 미흡한 의사(擬似)민주주의로 간주하든 한국정치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문제 삼는 건 사실에 부합하지도, 실익도 없다.

그럼에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개입 여부는 정권의 도덕성과 정당성 논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원 전 국정원장의 국정원 직무범위를 넘어서는 정치개입이나 대선개입 여부에 대한 사법적 판단의 차원을 넘어, 정황적, 심증적으로 원 전 원장이 대선에 영향을 끼쳐 자신의 향후 정치적 이익을 모색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원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 여부를 둘러싼 황교안 법무장관과 검찰과의 입장 차이에는 두 가지 개연성이 존재한다. 첫째 원 전 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면 정량적 검증은 불가능하지만, 직간접, 유무형으로 대선의 승패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형식 논리적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정권의 정당성 논쟁이라는 예민한 부분을 피해가기 위해서 국정원 직원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하자는 것이 황 장관의 입장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초대 법무장관으로서 박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 있는 정치적 부담을 차단하려는 나름의 정치적 고려가 개입된 '충정'의 발로라는 관점이다. 둘째, 청와대가 대선 과정의 정치적 정당성 논쟁을 피해가기 위해서 황 장관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원 전 국정원장 불구속의 가이드 라인을 전달했을 개연성이다. 만약 그렇다면 황 장관으로서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다.

무엇이 됐건, 아니면 제3의 이유가 존재하든 잘못된 발상과 접근이다. 어차피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개입되지 않은 사안이라면 검찰의 판단을 존중하고, 차제에 국정원 등 권력기관들의 정치적 중립을 정착시키는 계기로 삼는 것이 정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국정원의 부당한 행태를 지적하고, 대선 때마다 불거지는 정치권의 눈치보기나 줄대기 등의 고질적인 관행을 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천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법무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여 원 전 국정원장에 대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지 못하게 한다면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퇴는 말 할 것도 없고, 박근혜 정부는 예기치 못할 후폭풍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집권 측이 우려하고 있는 정치적 정당성 논쟁을 명시적이고 분명하게 촉발시키는 것이며, 검찰의 개혁 노력에 청와대와 정부가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생 국회가 끼어들 공간은 협소해 보인다. '정통성'을 둘러싼 논쟁은 정치권의 모든 현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만큼 휘발성이 강하다. 청와대나 황 장관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잃는 우(愚)를 범해선 안 된다. 보편적 상식에 입각하고, 사회적 통념에 충실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린다. 검찰의 판단에 맡기고, 이 상황을 오히려 권력기관의 정치적 줄서기의 악순환을 끊는 절호의 찬스로 반전(反轉)시킬 수 있는 현실 인식과 정무적 판단이 절실하다.

'정통성' 시비도 피해가고, 개혁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정권의 지지도를 더 올릴 수 있는 호기를 살리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청와대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것이 지지도는 평균이상 이지만, 개혁과 사정을 정치적 수사(修辭)차원에서도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에 주어진 기회이다. 취임 100일이 꽤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한 성찰도 그래서 필요하다.

최창렬 용인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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