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원룸으로 이사 때 짐 80% 창고에 보관한 뒤반년을 가족과 살았지만 불편한 점 없어 깨달았어요남의 집은 얼마만 하더라… 뭐가 있더라… 거실은…그렇게 이유없이 커졌죠 집에 대한 개념이 없는거죠
집이란 무엇일까. 삶의 터전? 재테크 수단?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집을 구하는 기준은 유년의 기억이 묻어 있다거나 자연이 곁에 있어 좋다거나 상냥한 이웃이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일생 최대의 쇼핑을 지독하게 자극해 온 것은 아파트 가격이 뛸 거라더라, 어디가 재개발된다더라 같은 개발 정보였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성장제일주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집을, 사고 팔아 돈 버는 대상이 아니라'삶의 터전'으로 새롭게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우후죽순 솟아 오른 아파트에 질려 주거 형태도 단독주택으로 관심을 돌리는 경우가 증가한다. 세대 표준이 '4인'에서 '1, 2인'으로 변하고, 일하는 방식이나 삶의 스타일이 다양해지면서 집은 크고 넓어야 최고라는 인식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으로 유명한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콩코드의 호숫가에 손수 4평 남짓한 작은 집을 짓고 거기서 생태주의의 사색을 길어 올렸다. 좋은 집은 어떤 집일까. 사람에게는 얼마만한 집이 필요할까. 작지만 집다운 집의 국내외 사례를 소개하는 시리즈'작은 집이 아름답다'를 8일부터 매주 연재한다. 첫 회에는 한국공간디자인 대상을 받은 금산주택을 설계했고 등 저술 활동으로 작은 집 철학을 활발하게 전파해 온 건축가 임형남(52) 노은주(44) 부부를 만났다.
"오래 전 이사를 가는데 새 집에 바로 들어가질 못해 아이 둘 데리고 원룸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요. 짐을 다 둘 수 없어 80% 정도를 유료 창고에 보관했는데 그렇게 반년을 살아도 뭐 하나 불편한 게 없더라고요. 문득 '이 80%는 뭐지, 여태까지 쓸데 없는 거 메고 다니며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건축설계사무소 스튜디오 가온의 임형남 대표와 노은주 소장은 7일 자신들의 설계로 완공을 눈앞에 둔 경기 여주의 한 주택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건축가를 대표하는 건축은 충북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의 간디학교 인근에 있는 '금산주택'이다. 2010년 선배 건축가의 소개로 만난 건축주는 처음 북쪽으로 진악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260평 남짓의 땅에 부부가 옮겨 와서 살 방 3개, 화장실 2개, 부엌, 거실 등이 있는 평범한 전원주택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계를 위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당분간 건축주 혼자 지내게 됐고, 그러면 큰 집이 뭐가 필요하겠느냐는 결론에 이르렀다.
도산서당 본뜬 일자형 네 칸 집으로 시작
그때 임 대표 부부가 떠올린 집이 퇴계 이황이 노년에 지은 도산서당이었다. 남향 일자형인 이 집은 마루와 방과 부엌이 쭉 이어진 단순한 집이다. 지극히 간결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다 가진 이 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보고 싶어졌다. 도산서당과 똑같이 가로로 긴 집을 그린 뒤 동쪽에 두 칸 마루를 놓고, 이어 한 칸짜리 방 두 개를 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서쪽 반 칸에 부엌, 화장실, 서재, 보일러실을 붙여 만들었다. 그래서 모두 22.9평이다.
"이해하기 쉽도록 옛 천원 지폐에 등장했던 도산서당을 이야기한 거지 실은 이런 구조는 한국 전통가옥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금산주택 주변의 집들도 대부분 맞바람이 통해 환기가 잘 되도록 하는 일자형이에요. 그런 시골 민가를 베낀 거죠."
지금 전원주택 분양지의 대지 80평 위에 짓고 있는 여주주택은 금산주택의 변형이다. 창이 있는 마루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방이 두 개, 방마다 작은 부엌과 화장실이 딸렸고 한쪽 방에는 다락도 있다. 그리고 다락이 없는 방과 마루 위쪽으로 베란다가 붙은 4평 규모 이층 방을 올렸다. 이래서 연건평이 23평 정도다.
금산주택으로 시작한 두 사람의 작은 집 짓기는 현재 크게 두 가지 계열로 이어지고 있다. 하나는 한옥 형태를 도입한 금산주택 계열의 목구조이고, 또 하나는 금산주택에 이어 작은 집 2호로 지은 광주광역시 화암동 무등산 자락의 '산조(散調)의 집'으로 시작한 철근 콘크리트 집이다. 한옥 스타일을 살린 집으로는 3대가 모여 사는 경남 거창의 '층층나무집'(연건평 35평)이 또 있고, 양옥 계열로는 강원 횡성과 경기 가평에 건축이 한창이다. 지금까지 지었거나 설계를 마치고 시공 중인 작은 집들은 평균 건물 면적이 20평 안팎 규모다.
마당 있는 집에는 거실 필요 없어
두 사람은 "처음 작은 집을 생각하고 왔던 건축주들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꾸 더 큰 집을 원하게 되더라"며 "그래서 대개는 처음보다 한 10평 정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그런 건축주들에게 두 건축가가 가장 자주 해주는 말은 "옛날 집을 떠올려 보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6, 7명 식구가 산 집이 다들 열 몇 평이었잖아요. 침대, 소파 같은 거 없었죠. 방은 식사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잠도 자는 멀티 공간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서너 식구가 70, 80평 아파트에 사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래서 줄이고 버릴 궁리를 하자고 말하죠."
큰 집에서 온갖 물건 갖춰 놓고 살다가 버리고 나면 힘들 것 같아도 의외로 건축주들이 그런 생활에 잘 적응하더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그런 과정을 집을 삶의 공간으로서 집답게 보고 느끼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여태까지는 집을 짓더라도 자기 관점이라는 게 별로 없었어요. 남의 집은 얼마만하더라, 뭐가 있더라는 게 기준이 되고, 집들이 할 때 몇 명이 들어와야 하니 거실은 이만큼은 돼야 한다고 해서 집이 이유 없이 커졌죠. 자기에게, 가족에게 최적의 맞춤인 공간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아파트가 아닌 주택 예찬론자들이다. 아파트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이 그냥 주어지는 기성의 공간이지만 주택은 자신에게 맞는 집을 무에서 창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을 짓고, 또 짓고 난 뒤 손수 고쳐 가며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주거문화라고 믿는다.
"아파트라는 공간에서는 소파에 가만히 누워서 한 손에 리모컨 쥐고 TV 보는 거 아니면 각자 제 방에서 인터넷 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잖아요. 지붕에 물이 새면 고치고 페인트 칠도 하고 애들은 마당에서 뛰놀고, 주택에서는 그런 게 가능하잖아요."
임 소장은 특히 "어린 애들이 있는 가족이 마당 있는 주택에 살면 거실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애들이 자연과 마주하고 있는 마당에 하루종일 있으려고 하지 집에 안 들어오거든요."
아파트는 편안하지만 사람을 길들여
그렇다고 이미 800만 세대를 넘어선 아파트 거주자들이여, 낙담하지 마시라. 작은 집 전도사 부부도 지금 6년째 35평 아파트를 임대해 살고 있으니까. 따로 건축사무소를 다닐 때나 합심해 1998년 스튜디오를 열고 나서나 두 사람은 바깥 일로 만날 바쁘다. 그런데 학원에 안 보내고 키우는 아이들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게 마련이고, 불안한 마음에 서울 신사동인 사무실 근처에 집을 마련하다 보니 별 수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임 대표는 시간이 갈수록 "집에 문제가 생기면 전화 한 통으로 바로 해결 되는 편안한 아파트 생활에 길들여진다는 불안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들은 결국 아파트를 떠날 사람인 거다. 그래서 어떤 집을 지어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제 고향이 지금 철공소가 많은 서울 을지로3가거든요. 거기 작은 땅이라도 사서 3, 4층짜리 원룸 주택이라도 지었으면 하는 게 꿈이에요." 임 대표는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아야 땅도 마을도 살아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 소장은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서울이 좋고 근처에 좋은 산책로가 있었으면 한다"면서 덧붙였다. "우선 일을 맡아줄 좋은 건축가를 찾아야죠."
여주=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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