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뒤에서 한 남자가 가느다란 실을 따라 무대 앞으로 나온다. 남자는 객석에 앉아 있던 한 여자를 무대 위로 초대한다. 남자를 따라 실을 잡은 여자는 객석에서 또 다른 남자를 무대로 부른다. 그렇게 실을 따라 7명이 연결된다. 그들을 따라 관객들은 무대 위로 소환된다. 7명의 무용수와 관객들이 연결되고 나서야 객석을 환하게 비추던 조명이 꺼진다. 칠흑 같은 어둠이 공연장을 덮친다.
암흑 속을 비추는 건 무용수들이 들고 나온 전등이다. 그들은 분주히 움직인다. 총격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처럼 극도의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 달리다가 넘어지고 다시 또 달린다. 4개의 릴 테이프 레코더가 정체 불명의 목소리와 시끄러운 소음, 불안한 음악을 뒤섞는 동안 무용수들은 강박적으로 짐을 던지고 받는 일을 반복하거나 바쁘게 식탁을 차린다. 깨진 꽃병을 주워 다시 끼워 맞추는 여자, 술을 마시는 남자, 굉음 속에서 뭔가를 외치는 남자…. 빗발치는 총성을 연상시키는 불빛 속에서 그들은 미친 듯이 춤을 춘다.
LG아트센터가 초청해 5일 선보인 프랑스 현대무용 안무가 마기 마랭(62)의 '총성(Salves)'은 2010년 프랑스 리옹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그가 이끈 프랑스의 누벨 당스(Nouvelle Danse)는 춤의 언어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시청각적 요소와 연극적 표현을 결합해 독일 현대무용의 한 장르인 '탄츠테아터'와 종종 비교되곤 한다. '총성'은 마기 마랭의 작품 중 국내에 다섯 번째 소개되는 것으로 마기 마랭 무용단이 직접 내한한 건 2003년 서울세계무용축제 이후 10년 만이다. 마랭은 비행기 공포증으로 이번에도 오지 않았다.
'총성'에는 뚜렷한 내러티브가 없다. 발레나 현대무용의 뚜렷한 표식들도 없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움직임'이 낯선 시어처럼 연결될 뿐이다. 무대를 지배하는 어둠 속에서 7명의 무용수들은 달리거나 춤을 추거나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발레와 현대무용, 제스처가 이어진다. 이전 작품들과 달리 대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무용수들의 외침과 중얼거림만 무대 위를 표류한다.
마랭은 '총성' 속에 건축, 조명, 음악, 미술, 사회, 철학에 대한 통찰을 담아 냈다. 무대 위의 혼돈은 불안과 공포, 분노에 휩싸인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악몽과 포개진다. 강렬한 시각적 표현과 반복적 리듬이 이를 더욱 강조한다. 마랭은 이 작품에서 "파괴되고 부서져버린 것, 1ㆍ2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사람들,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는 혼란, 점점 커져만 가는 개인주의 등을 말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공연은 7일, 마지막 1회가 남아 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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