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들어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에게 오히려 공약을 지키지 말아달라는 각계의 요구가 빗발친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개 정치인들이 공약을 헌신짝 버리듯 어기는 게 문제였다. 이번엔 거꾸로 됐다.
기현상의 발원지는 복지공약이다. 박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직접 증세 없이 서민복지를 대폭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상보육을 전면 시행하겠다고 했고,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크게 올려 월 20만원씩 주겠다고 했다. 대학생 등록금을 대폭 낮춰주고, 4대 중증질환 진료비를 국가가 전액 부담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막상 정부가 출범하고 공약 이행을 추진해야 할 국면에 들어서자 공약 수정 요구가 분출했다. 새누리당이나 정부에서 나온 무상보육이나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 부담에 대한 수정론은 비판 받아 마땅한 전형적인 공약 후퇴일 수도 있다. 그런데 비단 당정뿐 아니라, 재정을 안다는 전문가들이나 심지어 진보 학자들조차 '복지공약의 현실적 조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민주당도 공약 수정 요구에 나섰다. 지하경제 양성화 등을 통한 세수 확대나 세출 구조조정만으론 복지공약을 지키기 어려우니 증세에 나서라는 주장이었다. 저간의 사정과 속내는 복잡하지만, 요컨대 복지공약을 줄이거나, 아니면 증세를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번복해 세금을 더 거둬들이라는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진 셈이다.
어찌 보면 공약 부담을 덜 수도 있는 출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엔 역대 정부 최초로 공약가계부까지 공표하며 임기 내 직접 증세 없는 공약 이행 의지를 재차 천명했다.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지킬 약속을 하고,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킨다'는 '박근혜 스타일'을 웅변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어느 정도는 성심으로 받아들여졌고, 박 대통령에 대한 믿음을 보강했다.
취임 100일을 맞은 박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52%부터 많게는 65%를 넘고 있다. 취임 후 한 때 40% 초반까지 하락했으나 부지불식 간에 반등세를 탔다. 내각 지각 출범과 잇단 인사 파동, 그리고 악몽 같았던 윤창중 사건 속에서 대선 득표율 51.6%보다도 많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북한이 촉발한 안보위기가 보수층을 재차 결집시켰다는 그럴싸한 분석도 있지만, 국정에 대한 박 대통령의 성심을 믿는 국민의 조용한 평가가 지지율 회복의 견인차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사실 의외의 국민적 신뢰는 비단 복지공약에 대한 박 대통령의 성심 때문만은 아니다. 어쨌든 지난 100일 동안 정부는 경제민주화 또는 공정경제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사회 아젠다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공정위가 나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관행에 본격적으로 메스를 들이댔고, 대기업 오너 비리와 탈세에 검찰과 국세청이 대대적으로 나서 바람을 일으켰다. 세칭 경제민주화법안이 속속 발의된 것도 특기할 만했고, 북한의 안보위협에 의연히 대처한 것도 국민 저변의 지지를 얻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국민의 마음을 산 이런 면들이 대통령의 소신과 성심, 뚝심으로 일군 박근혜 정부 100일의 밝은 부분이다. 하지만 사물의 명암이 그러하듯, 지지를 일궈낸 박근혜 스타일은 역설적으로 인사 등에서 불통(不通)과 불신(不信), 오연한 자기 과신(過信)의 불안한 그늘을 드러내기도 했다.
취임 100일을 지나는 박 대통령 앞엔 이제 길고 험난한 참호전이 기다리고 있다. 당장 경제민주화법안을 둘러싸고 힘겨운 줄다리기가 벌어질 6월 국회가 그렇고, 경제 살리기나 노사정 대타협의 성공도 대통령만의 성심과 뚝심만으론 돌파하기 어려운 과제다. 대통령이 앞으로 정치력을 결집하고 보다 유연하게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서 박근혜 스타일의 그늘을 얼마나 걷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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