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만큼은 어쩐지 '여류시인(女流詩人)'으로 불러야 할 것 같다. 여류시인이라는 말에 어떤 서정적 풍모와 우아한 기품의 기미가 남아 있다면, 이 고전적 용어가 아직도 품 너른 모성적 언어와 섬세한 감성의 조탁을 의미한다면, 그 용례로 이 노시인만큼 적합한 이도 없을 것이다. 종이 위에 '사람아'라고 쓰고선 '두 손 펴 (그 글자 위에) 해가리개로 그늘 드리워'주는 이('이름을 쓴다' 중), 올해로 시업(詩業) 60주년을 맞는 김남조(86) 시인이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자 숙명여대 명예교수인 그가 새 시집 (문학수첩 발행)를 펴냈다. 2007년 나온 에 이은 17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책머리에서 '심장'을 표제로 올린 까닭을 "모든 사람, 모든 동식물까지가 심장으로 숨 쉬며 살고 있는 이 범연한 현실이 새삼 장하고 아름다워 기이한 전율로 치받으니 나의 외경과 감동을 아니 고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계산해 보니 3만 번 이상 떠오르는 해를 봤더라고요. 이 무궁한 누적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죠. 노년에 이르고 보니 세상 모든 것이 측은하고 또 아름다워요."그는 전화기 너머 낭랑하면서 리드미컬한 목소리로 "근년 들어 시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절반 가까운 시가 서너 달 사이 씌어진 것들이라니, '늙을 로(老)'자 쓰기가 민망해진다. 나이는 정녕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이 말이 진실의 일면만을 일컫는 수사라는 게 이 시집을 읽고 있노라면 자명해진다. '식민지의 아이, 노인 되어/ 일용할 오늘의 행복/ 고맙게 받고 있습니다'('일용할 행복' 중)라고 탄복하는 시인은 긴 세월 견뎌내고 살아낸 삶의 이력으로 언뜻 평범해 보이는 구절들에 깊은 울림을 불어넣는다. 그가 '아가들아/ 출생은 은혜이며/ 세상은 아주 좋은 곳이란다'('아가야, 아가 형아들아' 중)라고 자애롭게 말할 때, 이 행간에는 얼마나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들이 잠복해 있을 것인가.
서정과 신앙을 두 축으로 한 갑자(甲子)동안 시의 집을 쌓아 올린 그가 이번 시집에선 돌연 신에게 역정을 냈다. 한국가톨릭문인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를 격하게 만든 사건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시인은 '기습으로 사랑이 올 때보다/ 더 빠르게, 눈 몇 번 깜박이는 사이/ 죽음이 수만 명의 산 사람을 삼킨 일은 분명 착오였습니다'라며 '이제는/ 신께서 기도해주십시오/ 기도를 받아오신 분의/ 영험한 첫 기도를/ 사람의 기도가 저물어가는 여기에/ 깃발 내리듯 드리워주십시오'라고 요청한다.
1953년 전후의 폐허 속에서 첫 시집 으로 일군 서정과 자기구원의 탐구는 이번 시집에도 면면히 이어진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로 시작하는 '편지'(1971) 같은 그의 젊은 시절 사랑시들은 1980년대 말까지도 초ㆍ중ㆍ고교생의 연습장 표지나 일기장 속지에 단골로 인쇄되던 국민 애송시였다. 세월이 구비구비 흘러 이제 노년의 시인은 읊조린다.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심장이 아프다' 중)
"사람들의 가슴 속엔 저마다 악기가 하나씩 들어있어요. 시인은 표현하고, 그들은 표현하지 않은 것뿐이죠. 그래서 저는 늘 말합니다. 쓰는 것도 시인이요, 읽는 것도 시인이라고요."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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