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후2시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회관 20층 챔버라운지.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주재하는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철강 반도체 정유ㆍ화학 등 정부가 이른바 '전력다소비업체'로 규정한 20개 기업의 경영진들이었다.
윤 장관은 꼭 1년 전 홍석우 전 장관이 그랬듯, 산업계 관계자들에게 전력위기 극복에 동참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그는 "(원전 부품 검증기관의 시험 성적서 조작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올 여름 엄청난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운을 뗀 뒤 "의무 절전이 3~15%로 기업마다 다르지만, 피크시간대에 전력부하를 견디도록 절전대책을 시행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어 "적어도 내년 여름엔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도 했다.
참석자들 역시 "피크시간대 자가발전기를 최대한 활용하겠다"(권오준 포스코 사장) "전기를 많이 쓰는 설비를 8월에 정비할 계획"(정태윤 SK에너지 전무) 등 윤 장관의 요청에 적극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바깥 기온은 27~28도에 달했지만, 회의는 절전 협조를 당부하는 자리임을 감안한 듯 에어컨을 켜지 않은 채 '찜통' 속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기업들의 속내는 달랐다. 정부가 전력 공급확충 노력은 등한시하면서 전력위기가 반복될 때마다 왜 기업들의 희생만 강요하고 있느냐는 볼멘소리다. 그 중에서도 철강업계의 불만이 가장 크다. 철강업계는 국내 전력사용량의 9.6%를 차지하는 최대 전력다소비 업종이다.
예컨대 현대제철은 전기로로 고철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데 그 비중이 60%에 육박한다. 때문에 국내 2위 업체이면서도 지난해 포스코(6,340억원)보다 많은 7,500억원을 전기요금으로 납부했다. 만약 산업부 발표대로 8월 하루 4시간씩 전기로 가동을 중단하면 연간 3%의 생산량 차질까지 예상된다. 이원재 SK증권 연구원은 "오는 9월부터 3고로도 가동에 들어갈 경우 현대제철의 전기료 부담은 9,000억원을 상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정부가 장치산업의 특성을 모르고 일률규제를 밀어붙이고 있다"고 성토했다. 가령 정유업만 해도 원유 수입에서 정제, 고도화처리, 출하에 이르기까지 전 공정이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돼 있다. 어느 한 공정만 전기를 끊거나 절전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액체를 다루는 정유업의 속성상 가동을 멈출 경우 유종이 굳어버리게 돼 재가동을 하려면 고체로 변한 원유를 긁어내야 한다"며 "또 출력을 올리고 시험가동을 완료하기까지도 수일이 걸려 이로 인한 비용은 산출조차 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생활절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유ㆍ화학(SK이노베이션)과 반도체(SK하이닉스)를 계열사로 둔 SK그룹은 이날 50항목에 이르는 에너지 절감 실천대책을 내놨는데, 사업장이나 기존 설비의 전력효율을 높이는 방안들이 대부분이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전자업체들도 전력 다소비형 사무기기 사용 절제, 사무실 실내온도 제한 등 비공정 절전을 보다 강화하고 있을 뿐, 특단의 대책은 없는 실정이다.
재계 관계자는 "휴가ㆍ조업 일정 분산, 수요관리제 등 기업들이 절전에 동참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치들은 이미 작년부터 시행해 왔다"며 "정부가 또 다시 마른 수건을 쥐어짜내라고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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