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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6월 4일] 스토리도 스펙이 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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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6월 4일] 스토리도 스펙이 되는 세상

입력
2013.06.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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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점, 영어성적, 자격증같은 '스펙'이 아닌 도전정신이 채용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실제 SK그룹은 오디션 형식의 예선과 합숙평가를 도입한 '바이킹 챌린지' 전형을, 현대차는 5분 자기 PR을 잘하면 서류전형을 면제한다.

무척 바람직한 방향전환으로 신선했다. 대학 서열에 의해서, 졸업평점이나 자격증의 개수, 영어성적에 의해서 취업이 결정된다고 믿어온 취업준비생들은 그동안 여기에 매달렸다. 정작 중요한 어른으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사회인이 되기 위해 시야를 넓히며 다양한 경험을 해야할 대학생활은 사치로 치부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인재들이 막상 회사차원에서는 썩 활용도가 높지 않았나보다. 그러니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게 된 것. 잘만 운용되면 대학생에게는 새로운 시야를 가질 기회를, 회사에게는 문제해결능력을 가진 인재를 얻을 기회를 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렇지만 스토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취업준비생들은 "이제 스펙은 기본이고, 거기에 특이한 인생경력의 스토리텔링까지 만들어내야 한다는거냐"며 하소연한다. "기껏 학점과 토익 점수를 올려놓았더니 스토리가 중요한 경향이 됐다"고 하기도 한다. 그들은 기업이 굉장히 특이한 스토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해외활동이나 대외활동을 추가로 하느라 없는 경제적, 시간적 부담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스토리= 특별한 경험'이라 스토리텔링을 위한 새로운 스터디 모임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바로 입학사정관제다. 수능으로만 인재를 뽑는데 한계가 있기에 대학들은 다양한 전형을 만들고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해서 여러 가지 재능과 경험을 가진 학생을 뽑고 있다. 어느덧 2014학년 입시에서는 전체 대입정원의 12.96%(4만9,188명)가 사정관제로 선발된다.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그러나 실제론 소신을 갖고 고교생활을 하기보다 수능과 내신외에도 창의체험, 봉사, 동아리 활동도 숙제하듯이 미리 차곡차곡 준비를 하고 있다. 일부 특목고는 방학을 이용해서 해외봉사를 가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제도를 만들어도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기 마련이다. 바로 몇 년전 대학 들어올 때 고액을 내고 대입컨설팅을 받고, 봉사나 동아리 활동도 입시의 일환으로 생각해서 영자신문사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해온 이들에게 최근의 바뀐 취업전형은 입학사정관제나 다양한 입학전형의 재연으로 느껴진 것이 분명하다.

낯설고 처리하기 난감한 상황에 처하면 과거의 가장 유사했던 경험에 기반해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이 우리 두뇌가 하는 방식이다. 과거의 익숙한 방식을 새로운 상황에 대입한다. 두뇌는 회사들의 인재채용 관점의 변화를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대입전형의 변화와 같은 흐름으로 인식하고 그때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러니 최근 이런 대입제도가 편법을 동원해 악용하는 일부 수험생과 학부모들로 인해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듯이, 충분한 준비와 취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없는 상태에는 수험생들의 혼란만 가중시키고 새로운 형태의 취업준비 모임만 만들어낼 것이다.

스토리텔링은 중요한 능력이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으로 감동을 쥐어짜는 이야기는 뻔하고 도식적일 뿐이다. TV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자기 경험담을 맛깔나게 얘기하는 연예인들을 본다. 반복해서 듣다보면 다들 반지하 셋방에서 살면서 버스비가 없어 연습하러 갈 때 두 시간씩은 걸어 다녀봐야 유명 배우가 되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머지않아 스토리텔링을 가르치는 학원에 다니고, 스터디를 하면서 양산된 꽤 감동적이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경험을 기승전결의 딱 짜여진 구조에 눈물까지 살짝 비치며 말하는 취업준비생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인생사까지 잘 포장해서 내다 팔아야하고, 취업을 위해 가공해야하는 세상이 되버렸다. 감동까지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의 뇌는 가치판단보다는 익숙한 관성에 따라 움직인다는 생생하고 안타까운 사례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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